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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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들어와서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 많이 줄었다. 예의로 만들어진 편하지 않은 관계들과 자신을 드러내려고만 하는 겉도는 대화를 멈추고, 딱히 취할 이유 없이 마시던 술자리를 끊었다. 그리고 부탁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목적 때문에 억지스러운 저녁 약속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불필요하게 소진되던 에너지가 차곡차곡 귀하게 쌓여갔다.
하루는 스승이자 친구인 그가 보고 싶어 편지를 보냈다.
둥둥둥, 오늘에만 떠다니다,
닿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저 일 겁니다.
편안한 때, 그리울 때 온전히 연락 주세요.
이름을 잊어버려도, 꾸짖지 않는 산책로에 핀 들꽃처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 친구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당신의 친구 훈 -
답장을 받고, 아주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치 처음 데이트하러 나가던 그날처럼 왠지 모르게 설레 자꾸 오줌이 마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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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타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색이 있다.
이 색은 (2019년 9월 이전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 가장 검다. ‘가장 검다’의 의미는 빛의 흡수율이 100%에 가깝다는 말인데, 이를테면 한라산과 이웃한 오름들을 모두 반타 블랙으로 칠하면 산과 오름의 모든 굴곡과 입체감이 지워진 듯 평평한 하나의 면처럼 착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어떤 컬러가 들어와도 검정이라는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강렬한 아이덴티티와 동시에 언제든 화려한 빛 뒤로 제 모습을 지워버리는 이 색에 매료되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나도 검정색 옷과 검정색 같은 관계를 즐기기 시작했다.
검정색 옷은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지구를 위한 불편한 즐거움> 체크리스트 한 칸을 채우는 기쁨을 주고, 또 흙먼지 잔뜩 묻히고 거침없이 달려드는 물개와 맘껏 놀아줄 수도 있고, 어디서든 하늘을 보고 드러눕고 싶을 때 망설이지 않게 해 준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킬 것이 너무 많은 놀이터에서는 놀고 싶지 않잖아?
두려움 없는 솔직함을 대화 위에 던져 놓아도 서로의 색이 고유할 것을 알고 있기에 너와 나의 색이 자유롭고 즐겁게 뒤엉켜 노닐 수 있는 반타 블랙의 관계.
이것은 우리가 사랑할 때 정말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