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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Sep 18. 2021

폼츱 퐁싸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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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로 처음 여행 갔을 때 일이다. 여행에서 만난 젊은 중국인 부부 모모와 구구가 신장개업한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잡고, 이 먼 곳까지 나를 따라온 괴로움을 떼어낼 방법을 알려줄 스승을 만나기 위해 그날도 새벽부터 감각이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그리고 아무도 돌본 이 없지만 홀로 기특하게 열매까지 주렁주렁 맺은 바나나 나무 우거진 곳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동갑내기 스님 퐁싸를 만났다.


<폼츱 퐁싸>

 

그가 처음 나를 봤을 때 했던 말이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나는 퐁싸입니다>


그런데, 으래 한 번만 해도 충분한 자기소개인데, 내가 <오케이 오케이> 이제 알았으니 그만하라 신호를 줘도, 아랑곳 않고 그는 멈추지 않고 <폼츱 퐁싸! 폼츱 퐁싸!> 수십 번을 반복해 말했다.

 

<폼츱 퐁싸, 폼츱 퐁싸, 나는 퐁싸야>


안하무인 한 그의 집착은 점점 짜증을 불러일으켰고, 머지않아 그가 소시오패스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작은 체구에 대비되는 세상 풍파 다 겪은 듯한 노안 때문에 분위기를 더욱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낯설고 인적 드문 타국의 숲 속에서는 어떤 끔찍한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를 보호하려고 발동된 의심하는 자아가 내 감각을 긴장시켜 더욱 공포를 가중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를 안심시켰던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의 눈빛은 태국 마사지숍에서 주로 보았던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친절함은 아니었지만, 분명 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눈은 말보다 의사소통하는데 더 수월하고 편리하다. 무엇보다 눈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 중에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금세 나는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의 지팡이가 앞장서는 길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영어를 모르고, 나는 태국어를 할 줄 몰랐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이기적인 대화를 한동안 했다.

한 시간 정도 이어진 대화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낸 정보는 각자의 이름과 우리가 동갑이라는 것뿐. 이후로도 우리는 함께 산을 오르고, 폭포를 건넜지만, 어딘지 모를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그와의 동행이 더 이상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적이 적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 여정을 끝으로 그가 거주하고 있는 소박한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퐁싸는 자기가 모시는 부처상 앞으로 데려가 공양을 바치게 한 뒤 나를 중정 마루에 앉아 있는 큰 스님에게 인사시켰다. 큰 스님은 내게 사과주스 팩 하나를 건네고, 자신이 다녀온 한국과 한국 불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내보이며 대화를 주도해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방적 대화가 수 분간 지나가고 왠지 이 대화가 지난해 질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을 때,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며 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재빨리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퐁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적어도 이런 낯설고 신나는 여행을 열어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중정 우측으로 키가 큰 대나무밭에 둘러싸인 작은 암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 문을 열고 나오는 퐁싸를 발견했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반갑게 그를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바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혹시 나에게 줄 선물을 가지러 들어간 건가? 괜스레 기대하며 잠시 기다리니 곧 그는 문을 열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 또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는 내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문을 열고 나왔다, 다시 그 문을 닫고 들어가는 기이한 행동을 반복했다. 그의 기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 함께 여행할 때와는 달라진 사뭇 진지해진 눈빛은 금방 그를 낯설게 만들었다.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선 곳에서 180도 달라진 그의 태도를 서운한 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끝내 그와 작별 인사하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서는데, 큰 스님은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엷은 미소를 띠고 여유로운 손짓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이방인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두 손 합장하며 감사를 전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큰 스님이 입을 열었다.


<퐁싸는 지금 몰입하는 수련을 하고 있네>


퐁싸가 하고 있는 이 수련은 겨우 2kg 도 안 되는 가벼운 문을 제 가진 온 힘을 다해 열고 닫기를 반복함으로써 비록 아무리 작은 행위일지라도 거기에 내 100%의 정성을 들일 수 있다면, 오늘 하루 마주하는 모든 것에서도 그 존재의 완전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수십 번 반복해 자기를 소개하던 퐁싸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내게 결국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퐁싸라는 사람, 그 사람의 전부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폼츱 퐁싸, 나는 퐁싸입니다>


이 단문 속에 그는 그의 모든 역사를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다.



-

마을에 가까워져 건조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그리고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사서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는데 어디선가 퐁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이라는 축복 맛이 어때?>


오늘을 열고 맞이하는 모든 풍경과 인연에 모든 마음을 주고, 아쉬움과 집착 없이 그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좋았노라, 말하며 하루의 문을 닫는 법을 알게 해 준 퐁싸.

 

컵쿤 망막 크랍.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와 무릎과 고관절을 압박하지 않는 편안한 복장과 게으른 마음으로 내가 허락한 소음들만 지저귀는 가운데, 저 아름답고 우아한 지구의 풍경 한 조각을 오롯이 나 혼자 온전히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분명 어제와 같은 밤하늘이건만, 하늘은 이제 잘 시간이 되어서야 막 오늘에 도착한 내게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빠이_ 태국 북부 매홍손 주의 작은 마을이고, 배낭여행가와 히피들의 낙원으로 알려져 있다.




훈과 퐁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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