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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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에 빠져 마음이 요란하던 날,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에 대해 깊이 관찰한 적이 있다.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때, 정말로 그땐 난 왜 그랬을까 하는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저녁 장 보러 시장에 다녀오겠다는 엄마의 뒷모습에서 왠지 이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멈춰 세워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긴박함에 신발도 대충 구겨 신고, 터져 나오는 눈물 휘날리며 막 엄마가 문을 열고 나간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곳으로 펄쩍 내달렸다. 그리고 외쳤다.
<엄마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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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나의 외마디보다 그녀의 뒤통수에 먼저 가 닿은 것은 크고 둔탁한 무엇으로 유리문을 깨부수는 요란한 <꾕> 소리였다. 뒤돌아선 그가 목격한 것은 하루에도 족히 100번 이상 밖에서는 밀고 안에서 당기는, 절대로 까먹을 리 없는 우리 집 현관 강화 유리문에 처박혀 있는 아들의 거대한 머리통이었다. 엄마는 누나와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 좀 더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기대와 정 반대로 자라는 우리 남매가 탐탁지 않을 때마다, 늘 이렇게 훈육했다.
<너거 자꾸 말 안 들으면 고마 혼자 집 나가삘 끼다>
물론, 그날은 엄마와 나 사이에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다. 하지만, 반복된 그녀의 협박 같은 편리한 훈육이 달콤한 낮잠 자고 일어나 무방비 상태인 내 몽롱한 무의식을 세게 찔렀나 보다. 나는 엄마를 보내지 않으려 뛰어가다 머리가 깨졌고, 그녀는 평소 아들이 자신의 바람대로 자랄 것을 거칠게 요구하다 끝내 피를 본 것이다. 곧 119 구조대원들이 도착해 내 머리통에 둘러 쌓인 유리 면류관을 안전히 오려내고, 나는 병원으로 옮겨져 찢어진 양 관자놀이를 봉합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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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힘주는 방향으로 달려가다 장애물에 부딪혀 발생하는 사고는 우리 마음속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붙잡기 위해, 혹은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든 힘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생기는 법인데, 그때의 액션과 리액션이 부딪혀 나는 거센소리, 굉음을 나는 괴로움이라 부른다. 괴로움이 일면 내 마음은 온통 꾕꾕 소리로 소란하다. 그 굉음 때문에 마음이 미어지고, 또 두통이 생겨 삶이 어지럽다.
요즘 들어 내 마음에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잦다. 고통에 능한 사람들이 말하길 대부분의 괴로움은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주물러가며 괜찮아지겠거니 견뎌보려 했지만, 괴로움은 줄지 않고 오히려 생각날 때마다 분노와 화를 마구 집어삼키며 커져만 갔다.
그날도 <이 사고의 원인은 바로 너야>를 증명해줄 증거를 찾기 위해 그와 내가 부딪힌 기억 속 사고 현장으로 씩씩거리며 들어갔다. 그리고 괴로움의 출처가 새겨진 사고의 파편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손에 쥐어 든 파편들 중에는 사고 후 제때 정리하지 못하고 방치한 오래된 것들도 뒤섞여 있었는데, 처음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것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사고를 기억나는 대로 하나씩 더듬어 가다 보니 대부분 사고는 익숙한 지점에서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보이는 대로 들여다보니
과실은 주로 그들이 아닌 내 둥글지 못한 뾰족함과 옹졸함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