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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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은 꽤나 둥글어졌지만, 내게는 철학자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다.
위대한 철학자란 모두가 하나의 보편적 시각으로 편승해 갈 때, 홀로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중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철학자적 말하기>란 누군가의 생각을 잘 듣고, 곱씹어 보지도 않고 우선 <아니>라고 반대부터 하고 보는 대화의 태도를 말한다. 그렇다고 <아니> 뒤에 따라오는 대안이라는 것이 딱히 보다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대화의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틀리고 싶지 않다. 나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고집만 남아, 나를 옹졸하고 괴롭게 만든다.
어릴 적 누나와 다툴 때면, 엄마는 꼭 우리 둘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어떻게 졌는데, 그것이 이겼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역설적인 말을 두고 한참을 골똘히 탐구한 적이 있다.
당시 그 지혜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린 나이였고, 실제 이와 같이 사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에(부부 싸움할 때 연주씌의 눈빛은 패배를 염두에 두비 않았고, 당시 그가 운영하던 신발 가게 이름도 승리 신발이었다) 나는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배우지 못하고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 계발서가 유행하던 2000년대 초반, 내 스무 살의 책장을 채운 대부분의 책들도 주로 누군가를 설득해 내 의견을 관철시키거나, 경쟁에서 우위에 서거나, 성공하거나,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개조하는 식의 <이기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후로 내가 바라던 풍요로움을 위해 수많은 크고 작은 이기는 전투를 치렀고, 그 승리의 역사로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승리하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어째서 내 삶은 승리하면 할수록 자꾸만 추수할 것 얼마 없는 외로운 계절로 향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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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가져야 한다 했던 것들은 이제 모두 의미를 잃었다.
오히려 가지지 못해도 상관없다 했던 것들과는 편안한 친구가 되었고, 있으나 마나 개의치 않았던 작고, 둥근 것들이 오늘날 나를 깨우치는 스승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굴러왔는지, 물살 거센 강 아래 가장 완벽한 크기로, 가장 알맞은 곳에 동글동글 모 없이 모여 앉아 평온하게 쉬고 있는 작고 둥근 돌멩이가 온몸으로 내게 조언한다.
왜 이기려고 하는 거야?
이겨서 살고자 하는 삶의 목적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이라면, 꽤 많은 경우에서 지는 삶이 오히려 더 평화로울 거야.
진다는 것은 붙잡지 않고, 재빨리 흘러간다는 말이야.
그러니 너는 지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고, 이기기위해 옹졸해지지 않아도 돼.
그렇게 무엇이 이기는 것인지, 또 무엇이 지는 것인지 구분하지 않고도 너의 하루가 지금 이 순간에 둥둥둥 떠다닐 수 있울 때,
굳이 표현을 돕자면 너는 항상 이기고 있을 거야.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