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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Sep 30. 2021

혼자 살 수 없으면 같이 살 수도 없지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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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은 견디거나 피해야 한다.


행원리 우리 집에서 송당으로 올라가는 1112도로 초입은 3월이면 벚꽃으로 만개한다. 이 시기에 여행객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상상하며 가벼운 옷으로 한껏 멋을 내고 꽃구경을 오지만, 제주도는 육지보다 봄이 조금 더 일찍 올뿐, 나와 우리 집 식구들은 3월의 끝무렵에 내복을 벗고, 4월 한라산 꼭대기에 눈이 완전히 녹으면 5월에 돕바를 세탁한다.

 

또, 에매랄드 빛 바다로 유명한 제주의 여름이지만, 이곳의 습도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주민들이 있을 정도로 여름 제주는 아름답지만, 꿉꿉하고, 무덥다.


4계절이 뚜렷한 북반구에 위치한 제주도는 겨울이 오면 너무 추워서 괴롭고, 여름이 오면 너무 습해서 괴롭다.

 

이런 환경에서 10년을 살며 깨달은 <평범한 진리>가 있다.


겨울 혹한의 괴로움은 견디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옷을 걸쳐 입는다.


여름의 습하고 찌는 듯한 괴로움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린 옷을 벗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괴로움은 우리 마음속에도 있어서 어떤 것은 견뎌야 하고, 또 어떤 것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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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성질을 띈 혹한의 괴로움은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게 만든다. 살이 에이는 듯한 괴로움은 다 외로워서 그런 거다. 그럴 때면 얇은 것부터 안에서 차곡차곡 겹쳐 입으니 한결 좋아졌다.


마음이 가난한 시절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칩거를 시작하고 며칠 만에 혓바닥이 보랗게 변했다. 얼마 안 있어 잇몸과 이빨 사이가 시렸다. 밤낮으로 와인을 붓고 양치도 하지 않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세수는 언제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개의치 않았다. 쉬 싸러 화장실 갔다가 의도치 않게 거울 속 나와 마주쳤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뭔가가 잔뜩 묻어있었다. 비누로 박박 거품을 내 세수를 했다. 지워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수에 클렌징 폼을 짜서 박박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의원을 찾았다. 의사가 말했다.

 

<얼굴에 외로움이 잔뜩 묻었네요. 우울증입니다>


처음엔 자도 자도 잠이 왔다.

무기력증이 마음속 너무도 깊숙이 잠식해 몸을 일으켜보려는 의지 자체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을 자려고 자려고 애써도 잠이 오지 않는 나날로 이어졌다.

간신히 일어나 일상을 보내는 시간 동안에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보다 솔직하게는 쪽팔리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 기분 좋은 척, 별일 없는 척했다.

 

그렇게 나를 방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알고자 찾아 나설 힘도 용기도 없었다.

어떤 날은 하루 동안 느낀 감정이 괴로움이 전부인 날도 있었다.


비참했다.


<이런 초라한 삶, 이제 의미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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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기도 하지, 이런 와중에도 맺어지는 인연들이 있다.

그때마다 가볍게 넘어져도 사랑받기 위해 더 크게 울부짖는 연약하고 교활한 아이처럼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 속에 엉켜버린 내 사는 꼴 좀 봐>하며 이해를, 또는 위로를, 본질적으로는 사랑을 구걸했다.

하지만, 외로움으로 시작된 관계는 늘 광기로 끝이 났다.


외로움에 던져진 내가 발버둥 쳐 침몰시킨 구명정이 한둘이 아니다. 혼자 살 수 없다면 같이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수많은 이별 후에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난 뒤였다.

 

<같이 살기 위해 나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잦아들지 않고 때때마다 찾아오는 술 취한 감정, 외로움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무엇이 나를 외롭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자꾸만 외롭게 만드는지 내 안의 외로움의 출처를 쫓아 걸어 들어 가보니 그 터 무늬에 내 아비가 새겨져 있었다.



-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별들을 끝끝내 우주 밖으로 내몰아 스스로 외로워진 자.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대신 별을 헐뜯고,

자신의 어두움을 들킬까 봐 별의 밝기를 점점 잃게 만들었으며,

그의 옹졸함은 별의 성숙함을 시기했고,

외로움으로 시작해 비겁한 자유로 돌아가길 반복한 그의 권태는 별들의 순수함을 짓밟았다.

 

증오해오던 그의 ‘아버지스럽지 못한’ 모습을 오늘의 나 자신에게서 발견했을 때, 나는 괴로워 울기보다 당황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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