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y Essay #5
고등학교 시절 내가 유일하게 신뢰하던 어른이 있었다. 어머니라는 단어 다음으로 나에겐 이모부라는 단어가 마음이 아린다. 시골에서 가족들이 서울로 전부 상경했고 이모부는 돈을 벌기 위해서 터널 공사장 일을 하셨다. 그리고 가끔 서울에 가족들을 보러 오셨다.
우리 집은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매일 술에 취해서 어머니에게 폭력과 욕설을 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집 안에 모든 벽을 자신의 변으로 자취를 남기셨다. 경찰을 불러도 소용없었다.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였다. 이런 상황에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었다. 힘들다는 한 마디조차도 얘기할 수 없었다. 사실 아무도 듣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대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그렇게 닫힌 마음에 유일하게 손을 내민 건 이모부였다. 이모부가 서울로 오시는 날에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던 것 같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인사를 드리고 문 앞을 나서는데 이모부가 나를 부르며 돈 2만 원과 힘내라는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지금은 2만 원 밖에 없지만 다음에는 더 많이 주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셨다. 나에게는 그 돈 보다 그런 관심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한 달 정도 뒤에 연락이 왔다.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터널 공사도중 쓰러지셨고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렀다는 내용을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장례식장을 나와 조용히 혼자 울었다.
내 유일한 희망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독일을 오기 전까지 나는 종종 이모부의 제사를 할 때 모르는 어르신들 옆에 서서 같이 절을 드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요즘도 종종 이모부 생각이 난다. '코로나19'가 발생했던 초반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었고 여러 가지의 격리 정책과 거리두기가 한참이던 시절이라 성묘를 가려했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이후로 한국을 못 간 지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었지만 아마 다음번 방문 때에는 찾아뵈려는 노력을 할 수 있기를 나 스스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