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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Sep 14. 2023

아 숨기지 말 걸

그동안 숨어있던 내 무언가에게

한동안 브런치 글을 죄다 밀어버린 적 있다. (불과 30분 전까지 ㅎ..) 그리고 새로운 글을 써 내려가다, 말다 했다. 그 사이 나는 무사히 인턴을 끝냈고 두 번의 취직과 퇴사를 했으며 알차게 졸업까지 했다. 그런데 도무지 내가 성장했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썼던 글들이 부끄럽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냥 대책 없이 숨겨버렸다.




유달리 잠이 안 오던 어제 밤, 문득 며칠 전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생기부를 떼 봤는데 은근히 읽는 재미가 쏠쏠했더란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정부 24에 들어가 '생활기록부'를 검색했다. 하지만 내 초중고 생활기록부를 열람한 건 새벽 2시가 다 되어가서였다. 비회원으로 열람을 하자니 금융인증서가 필요했는데, 금융인증서를 만들려면 OTP카드 필요했다. 그런데 분명 OTP카드를 지갑에 넣어뒀던 기억이 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비회원 열람에 실패했다. 다음으로 시도한 회원 열람. 문제는 이걸 하려 해도 인증서가 필요했단 것이다. 다행히 어찌 저찌 금융인증서를 발급받아 회원 등록에 성공했다. 그런데 분명 발급받았는데, 조회 가능한 페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전자 지갑에 들어가야 한단 사실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 새벽 2시가 된 거다.


어쨌거나 나조차 잊고 있던 12년 간의 기록에 관해 말해보자면, 진짜 다 잊고 있던 것들 투성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학생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듯했다. 과목 옆에 적힌 초라한 성적과 반대로 선생님들은 학생 평가에 칭찬을 잔뜩 적어 두셨다. 착하다, 밝다, 친구와 잘 지낸다.... 학생이라면 으레 받는 칭찬일 수 있지만 12년 학창 시절 내내 같은 말이, 비슷한 평가가 있던 걸 보면 믿을 만해 보였다. 무엇보다 '장래가 촉망됨'이란 말이 무척 많았다. 특히 성적을 아예 갈아엎던 시절은 고등학생 때도 그런 말을 적어주셨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항상 말로는 '과정이 중요하지', '성과 만능 주의 사회 최악이야'란 말을 달고 살면서도 나조차 숫자로 환산되는 삶에만 목매고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노력해서 혹은 공들여 뭔갈 했을 때 그에 합당한 결과물이 도출되지 않으면 나는 다 잊고 살았던 거다. 모든 게 쓸모없는 줄 알고.




한동안 묻어뒀던 글을 다시 발행한 이유다.



브런치를 시작한 게 2019년이니, 4년 전의 글부터 최근까지의 글이 저 깊은 먼지 구덩이에 묻혀있었다. 하나, 하나 읽다 보니 신난 모습이 잔뜩 묻어난 여행기도, 물에 젖은 솜처럼 우울한 인턴 생존기도 그냥 재밌었다. 서툰 글이지만 솔직히 뭐 지금도 서툰데, 그게 중요할까 싶었다. 무엇보다 짧은 댓글로 당시 나의 감정에 많은 공감을 해줬던 독자님과의 소통마저 저 멀리 묻어버렸단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왜 글 쓰는 직업을 택하려고 했을까? 이전에 나는 글을 쓰고 싶었나란 질문을 잊고 살았던 듯하다.




내 글쓰기의 시발점이자 오랜 꿈, 종종 징글징글하기도 한 나의 바람. 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언론고시에 실패하면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다 무용해지는 걸까? 말로는 아니라고 하며 살았지만, 어쩌면 나는 '당연히 쓸모없지'란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나는 기자, 그 이전에 글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현상을 관찰하고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그걸 읽는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즐거웠다.


글을 하나씩 재발행하며 다신 글을 숨겨두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또 사람 맘이란 게 정말 갈대 같아서 이러다 또 한 순간에 냅다 지워버릴 수도 있다.(ㅎㅎ). 하지만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내 변화의 궤적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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