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줄 알았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쓴 작가 김승옥을 좋아했고, 민주화 투사들의 결의를 존경하던 문과생이었다. 반면 이과생이던 내 친구들은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내가 생태계 나무를 그리는 것조차도 헤맬 때, 그들은 멘델의 유전 법칙쯤은 식은 죽먹기라며 과학 전과를 펼쳐보지도 않았다.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는 낙하 운동은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간결한 기본 법칙이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이과생의 모습은 교과서 너머의 이과적 사고력이었다. 하루는 이과생 친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너 1+1이 왜 2인 줄 알아?’라고 묻더라.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란 얼빠진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1+1이 2란 사실은 사칙연산을 배울 때부터, 노란색 꼬꼬마 가방을 메고 다닐 때부터 사과를 하나씩 바구니에 담으면 사과 두 개가 된단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우지 않았던가.
친구는 양쪽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어깨를 미세하게 치켜세우며 ‘페아노 공리계’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당시 나는 ‘저게 무슨 소리야’라며 반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었기에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덧셈의 정의를 내리고, 자연수란 무엇인지 약속한다면 의외로 간단히 ‘1에 1을 더하면 2가 된다’란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덧셈의 정의를 내린다’는 행위만큼은 제법 강렬하게 다가왔다.
익숙하고 당연한 단어를 재정의 하는 것은 문과생이 사랑하는 말놀이 중 하나기 때문이다.
자연수(1,2,3,4…)란 무엇인지 합의가 있을 때, 수학적으로 덧셈의 정의는 ‘다음 수로 나아가는 과정’ 정도로 정의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법칙이 아닐까. 예컨대 아이돌 음악만 좋아하던 사람이 밴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두 가지로 늘어난다. 대구 출신 아이들만 지내던 교실에 서울에서 살던 아이가 전학 온 다면, 그 교실을 구성하는 학생의 고향은 대구와 서울 두 곳이 된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자면 사회도 그렇것이다.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 이들이 ‘더해질 때’ 비로소 사회는 ‘2’라는 다음 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적 덧셈은 서로에 대한 ‘화합’이다. 보통 사회적으로 다음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발전으로 여겨지니, 2에 다음 수가 다시 더해진다면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문과생의 입장에서 ‘덧셈’은 함께 함으로써 발전하는 공동체의 노력 정도로 재정의 해보고 싶다.
가짜, 왜곡 그리고 전쟁 ……. 최근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려오는 말이다. 이 가운데 언어는 종종 상대방을 향한 날카로운 칼날로 비화하곤 한다. 수학적으로 덧셈을 정의하려 제법 많은 수학자가 곯머리를 알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의 삶은 변화무쌍한 생물과 같기에 (수학에서의 정확한 한 줄 같은) 유토피아로 정의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1’이 무엇인지, 나아가야 할 ‘2’는 무엇인지, 2 너머의 숫자는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