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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Oct 10. 2023

어쩌면 전쟁이란

잘 살고 싶단 바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또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보며 어떠한 이유에서든 무력 충돌이 일어나선 안된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길고 긴 역사 가운데, ‘전쟁’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최근 나조차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에 일종의 죄책감이랄까, 의구심이 들었다.



누군가는 흔히 소리 없는 전쟁이란 말에 우리 삶을 비유하곤 한다. 흑사병만큼은 아니지만 질병 X의 공격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으며, 지구적 평화 조약이 존재하지만 전쟁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이전과 달리 눈에 띄는 피해 규모가 줄었다 뿐이지, 어쩌면 현대인들은 이전보다 다양한 형태의 전쟁 가운데, 더욱 집요해진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질적 문제인 N중고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내가 1592년의 조선에 살았다면 피란을 가다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1950년을 겪었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하며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로 평생 남을 고통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과거의 인류와 현재 우리의 삶 중에 누가 더 괴롭고 힘든지 겨루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요즘, 나조차도 ‘전쟁’ 같은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현대사 수업 시간에 범죄와의 전쟁을 배우고선, ‘굉장히 잘한 일’이란 생각을 했다. 코로나19 최전선에서 싸우던 공공병원을 보고선, ‘숭고한 희생’이라 느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당시에 발생했단 사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공공병원이 폐업위기에 놓여있단 걸 알게 된 것 역시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러니 일상을 훼손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란, 여러 형태로 평범한 삶을 침해하는 일련의 침투는 아닐까.

어쩌면 각자가 해내는 고군분투는, ‘전쟁’ 보단 ‘투쟁’이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명확한 승자와 패자가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반면 투쟁은 자신의 안녕을 얻어내는 노력력에 가깝다. 여기엔 적어도 승자와 패자가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를, 사회를, 일상을 두고 ‘전쟁’에 비유하는 건 그만큼 개개인의 일기가 고달팠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여의도를 원망하고, 용산에 실망하고, 청와대에 야속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안녕을 보장하기도 쉽지 않은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이 바라는 안녕은 일상적이다. 고급 아파트를 꿈꾸지 않는다.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전셋집이라도 원한다. 좋은 날엔 망설이지 않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를 바란다. 가계부를 쓰며 한숨을 쉬기보다는, 맘 편히 다음 달의 규모를 짜길 바란다. 다리에 깁스를 했더라도, 안전하게 지하도를 건너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잘 살고 싶다’란 바람이 그렇게 대단한 소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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