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때굴 Apr 13. 2019

여행, 여기라면 행복할까?2

WTF, Happy new year!

오늘은

편견 없고 안쓰러웠지만 즐겁고 유쾌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앞으로 소개할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나이도, 국적도 모르지만.

그리고 정말 짧은 순간을 스쳐간 사람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난 그 사람.

독일에서 만난 "WTF, Happy New Year"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cf) WTF=What The Fuck(젠장, 염병)






그때는 별 일 없을 줄 알았지

2018년 12월 31일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새해 전야일 것이다. 시작은 좋았다. 베를린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연말 치고 사람이 북적이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더구나 저녁에는 베를린 필 하모닉 공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하루가, 한 해의 마무리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웬걸,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여행지에서 맞는 비는 나름 운치가 있으니까. 또 흔하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리는 공연 전까지 남는 시간에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 부르크 문에 들리기로 했다.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모습이 문의 조금 낯설었다. 흔히 사진에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얀 천막에 경찰, 바리케이드까지.


"저기 혹시 무슨 일이에요?"

문 주위를 둘러싼 경찰들에게 물어본 결과, 전야제 행사 때문에 일대를 통제 중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뿔싸, 연말연초에는 통제나 행사가 많아 미리 검색을 해봤건만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구글 지도에도 통제 지역이 나중에야 표시가 되어서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멀리서 사진이나 찍자는 심정으로 문 주위를 돌아 나왔다. 그 탓에 공연 시간에 살짝 늦을 뻔했지만 다행히 제시간에 들어가 무사히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브란덴 부르크 문까지 얼마나 걸려요?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에 찍히지 않은 곳이 다 통제 중이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빗줄기가 굵지 않아 얼른 역으로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우리는 길에서 거의 3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거리 통제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기 때문이다. 가는 길목마다 경찰이 길을 막거나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어쩌나 하는 마음에 길을 물어봐도 빙 둘러서 걸어야 한다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대중교통도 안되고 택시도 안되고 길도 없다면 있는 길을 따라 걸어야지. 점점 굵어지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베를린의 밤을 걸었다. 전야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최대한 빨리 숙소로 가고 싶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맞은편에 굉장히 큰 배낭을 멘 여행객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종이 지도를 쥐고 울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스쳐 지나갈 줄 알았는데, 여행객이 말을 걸었다.


"@#$%$%^"

"네..?"

"^%$#$&, 아!"


그 사람도 꽤나 정신이 없었나 보다. 혹은 정말 열린 사람이거나. 나에게 자기 나라 말로 말을 건 것이다. 아직도 궁금하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의아한 내 표정을 보더니 미안하다며 다시 영어로 질문을 했다. 멋쩍은 표정과 함께.


"여기서 브란덴 부르크 문까지 얼마나 걸려요?"

"좀 걸리는데 지금 통제 중이라 못 갈 거예요"

"WTF!"


살면서 들은 WTF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시원한 WTF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 순간이 어찌나 재밌던지 그냥 웃어버렸다. 나도 웃고 친구도 웃고, 그 사람도 웃고. 다 같이 비를 맞으면서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 말았다. 한참을 웃었을까. 우리는 다시 문으로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근처에 가면 멀리 서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중간에 통제된 길이 많기 때문에 돌아 돌아가야 한다는 것 까지.


결국 그는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기왕 왔으니, 무거운 가방을 메고 종이 지도를 보며 여기까지 왔으니 포기하기가 아쉬웠나 보다. 아무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여행을 오지만 좋은 것들을 보고 구경하고 느끼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다. 우리는 숙소로, 그는 브란덴 부르크 문으로. '해피 뉴 이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보면 그 이름 모를 여행객이 건넨 해피 뉴이어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 가장 처음으로 들은 신년인사였다. 그 누가 베를린 길 한복판에서 비를 맞으며 처음 본 사람에게 신년 인사를 들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조금은 고되고 힘들었던 여행의 하루를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해 준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그래, 국적이나 나이 혹은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 적어도 내게 그는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을 남겨준 고마운 기억으로 남을 사람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행, 여기라면 행복할까?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