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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May 30. 2019

삶이 영화라면 배터리 좀 갈고 가겠습니다.

스물넷의 어느 날

오늘 하루, 취준생 A는 이상하리만치 되는 일이 없었다. 우선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평소에는 잘하지 않던 실수를 했다. 나름 4년 차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했었는데 초급자도 하지 않을 법한 실수를 하니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원래대로라면 다음 날 발표 예정이던 인턴 서류 합불 결과가 하루 일찍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한 결과는 역시나 탈락이었다. '그럼 그렇지' 애써 무거운 마음을 달래며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그러다 문득 한 달 전 응모했던 공모전이 생각났다. 5월 중 홈페이지에 당선자를 공고한다고 했었는데, 오늘 즈음이면 결과가 나왔을 것 같았기 때문다. 예상대로 수상자 명단이 올라와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곳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오늘 하루, A가 있기를 바랐던 그 어느 곳에서도 A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해피 앤드 새드 엔드

왜 우리는 영화와 인생이 닮았다고 하는 것일까? 단순히 생과 사에 비견되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그 안에 삶에 비유할 수 있는 기승전결이 있기 때문일까? 만약 그런 이유만으로 삶을 영화에 빗댄다면, 그것 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보통 영화의 결말은 두 가지다. '해피' 혹은 '새드'. 우선 해피엔딩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해피엔딩 영화가 결에서 당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승-전으로 이어지는 서사에서 주인공이 고난을 겪어야 한다. 힘듦을 이겨내고 성취한 기쁨만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던 인물들은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소소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복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새드엔딩'은 어떨까? 마찬가지다. 극적인 서사를 가진 주인공만이 결말에서 관객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수 있다. 주인공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이야기 내에서 고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피엔딩과 마찬가지로 원래 힘들었거나, 어중간한 고난을 겪은 주인공은 진정한 새드엔딩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좀 더 불쌍하고 처절하고 비참해야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더 진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은 극단적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은 평생 만날 수 없어야 하며, 복수를 하더라도 마음속 한 구석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남겨질 이들을 위해 웃으며 떠날 수도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영화적인가.


결국 영화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의 인생도 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고난은 극히 일부분이 집중적으로 보여질 뿐이다. 현실의 고난은 그 이면의 것들과 함께 찾아온다. 우리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영화 속 그들보다 더욱 많은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A의 하루는 어때 보이는지

다시 처음의 A의 하루로 돌아가 보자. A의 하루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그가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는지, 혹은 흔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는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생각은 후자에 가깝다. 아직은 어리고 채 준비되지 않은 A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어쩌면 대부분의 또래에게 일어나는 일을 유달리 크게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A는 오늘 힘들어할 자격이 없을까? 글쎄, 그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일 것 같다. 오늘 그는 충분히 지쳤을 것이다. 하루 종일 서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다리는 퉁퉁 부었을 것이고, 서류에서부터 떨어졌다는 사실에 좌절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공모전까지 탈락했으니 체력적으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A의 삶을, 이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의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누가 볼 것인가? 그의 고난은 제대로 된 고난에 비한다면 힘든 축에도 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지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친구들과 만나기만 하면 취업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으며 '번아웃'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일쑤다. 힘들기는 무진장 힘든데 영화의 주공이 될 만큼은 아닌 그의 인생. 그 어정쩡한 삶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극적이어야 영화라면 스크린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모두의 삶이 극적일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매 순간이 힘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등락이 심한 것도 한순간이어야지, 살아가며 겪을 고난들이 영화와 같다면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굳이 영화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태어났으니 이왕 사는 거 영화처럼 멋있게 살아보자고. 물론 그 말도 맞다. 주어진 삶을 멋있게 살아내는 것은 가치 있고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말에 얽매여서 스스로를 고통받게 할 필요는 없다. 필름 속의 삶이 나를 지치게 한다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면 된다. 혹은 잠시 배터리를 갈며 쉬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도, 배터리를 갈고 잠시 쉬어가는 것도 어느 정도의 불안함을 동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춰 살아가는 것보다 견딜만하다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지도 않을까 한다. 굳이 영화 속에서만 주인공이 되라는 법은 없다. 결국은 자신의 삶이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면 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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