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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Dec 21. 2019

글태기 안녕

쥐구멍에 볕이 들었어요

사실 그동안 '글태기(글+권태기)'가 왔었다.


계속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니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글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나의 눈은 굳은 지 오래였다. 매일 취업전쟁을 치르느라 마음의 여유도 없던 탓도 컸다. 예전처럼 올리고 싶은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말을 지어내 글을 썼겠지만, 날이 추워지니 사진을 찍으러 다닐 생각도 사라졌다.


결국 브런치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나름 좋아하는 일을 인정받아 작게나마 '작가'의 타이틀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잠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고작 스무 편을 쓰고 소재가 고갈된 글쓴이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쉬다 보면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쓰고 싶어질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글'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몇 달을 흘려보냈다.


그동안 그렇게 싫어했던 자기소개서만 주야장천 써댔다. 어떻게 하면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을지, 좀 더 괜찮은 인간처럼 보일 수 있을지 밤새 고민했다. 인턴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아르바이트도 때려치우고 휴학까지 했지만 여전히 백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복학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만 커졌다.


채용사이트에 올라온 거의 대부분의 인턴 공고에 지원을 했고, 당연하다는 듯 모두 떨어졌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점심도 거른 채 잠만 자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를 찾는 전화는 광고밖에 없으니 당연히 받지 않았다.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짧게 끊은 것을 보면 광고가 틀림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들려는 찰나, 불현듯 얼마 전 지원서를 넣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미 서류 합격자가 발표된 상황이라 나에게 연락이 올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세상에나, 얼마 전 지원했던 곳의 전화번호였다.


부랴부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막 잠에서 깬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신호음이 가는 찰나의 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헛기침을 했다. 아마 요 며칠 동안 했던 모든 것들 중 가장 열정적이고 다급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여보세요?"

"네, 방금 전화를 못 받아서 다시 연락드렸는데요"

"000 씨 되세요?"

"네 맞습니다"

"서류 추가 합격하셔서 연락드렸는데요, "


세상에나

그대로 잠에 들었으면 어쩔 뻔.


"그런데 면접이 바로 내일인데, 괜찮으신가요? "






오랜만에 잡은 면접 기회였다. 그동안 불합격 통보조차 받지 못하고 떨어졌던 수많은 서류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들 인턴은 금방 한다던데. 나는 지지리도 못 붙는구나' 라며 자책했던 지난 시간들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올해 마지막이 될 면접일 수도 있었다.

채 하루도 안 되는 준비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루도 안 되는 준비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망쳤던 면접들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면접장을 나서며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전에 실기 시험을 치르고 오후에 면접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으니 걸음이 조금 어색했다. 머리를 묶을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나의 이름이 불렸다. 손에 땀을 닦으며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20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할 일 없는 백수였던 나는 그날도 해가 블라인드 너머에 걸릴 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콩 튀듯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합격이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인턴 합격이었다.


오늘로 첫 출근을 한 지 한 달 하고 3일 째다. 그동안 브런치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금방 합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여행기가 끝나면 인턴 준비 기간 동안 일상 에세이를 쓰다 자연스레 '인턴 생존기'를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뭐, 아등바등 하루를 살아가는 생존만 하고 있으니 더 이상 일상 에세이를 이어 나가기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쥐구멍에도 볕은 든다고, 다행히 붙었다. 거의 1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값진 결과였다. 앞으로 5개월 간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인턴 생활을 할 것이다. 물론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인턴 생활은 더 이상 꿈이 아닌 지독한 현실이지만 말이다. 앞으로 브런치에 '인턴 생존기'를 올리려 한다. 사실 조금 더 정리를 하고 글감을 모아 내년부터 시작하려고 했지만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몇 달 간의 글태기가 끝났다. 일상의 권태도 끝났다.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벅차다. 그동안 쉬면서 문장이 많이 굳어버렸지만, 아무렴 어때. 앞으로 브런치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데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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