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Oct 17. 2023

버스

우리가 우리에게 너그럽던 날들

차장이 와서 승차권을 끊는다. 10대 후반의 건들대는 소년이다.

“호안끼엠.”

나는 목적지를 말한다. 그가 근엄한 얼굴로 “오케이”라고 답한다. 버스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오르고 차장은 표를 끊는다. 때때로 경쾌하게, 때때로 근엄하고 단호하게. 버스는 30분 넘게 도시를 달린다. 당신과 나는 번갈아가며 잠깐씩 존다. 잠시 후 차장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전히 근엄하고 앳된 얼굴로 말한다.

“next!”


당신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선다. 우리는 일어선다. 차장이 서둘러 다가와 팔을 뻗으며 막아선다. 단호하게,

“no! no! next!”


당신과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린다. 다음 정류장에 멈추기 전 그가 우리 앞으로 다시 다가온다. 이번에는 내려도 좋다는 표시다. 여전히 근엄하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그의 지시에 따라 내릴 준비를 한다. 그가 ‘잘했다’는 듯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마주보며 웃는다. 앳된 소년의 근엄함이라니. 나이를 숨기려 부러 잡은 주름으로, 외국인을 대하는 조금은 과장된 친절로 안내하던 그 소년이 귀엽고 고마워서.

목적지를 지나쳐도 상관없는 날들, 생각이 생각으로 그쳐도 괜찮은 시간들, 우리가 우리에게 너그럽던 하루들, 말과 말이 섞여 이루던 마음의 이해들, 그날 사진 속 당신과 나는 치아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여행의 사물 

#버스 

#잇다와있다사이를오가는시옷(ㅅ)

이전 01화 사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