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Oct 20. 2023

맥주

인생 일몰, 의문의 1패


눈의 계곡을 다녀오며 알펜루트 구역 안에 숙소를 잡기 잘 했다 싶다. 그 여운을 하루 더 누릴 수 있어 좋았다. 숙소는 해발 약 1,900m 고지다. 아침과 저녁을 포함해 주변 숙소에 비해 가성비가 빼어났았다. 무엇보다 저녁을 먹으며 식당에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한라산 백록담 즈음에서 보는 일몰이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전에 습지 산책로를 걷는다. 고산습지는 막 눈의 계절을 벗어나고 있다. 산 아래는 시가지 고층 빌딩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만하면 천국 산책이다. 짧은 산책을 끝내고 일몰 시간보다 넉넉하게 도착해 식당 서쪽 창가에 자리 잡는다. 손님은 당신과 나를 제외하고 한 테이블이 더 있다. 유타카를 입은 중년 일본부부다. 두 사람은 이미 맥주 한 잔을 곁들여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자주 창밖을 곁눈질한다. 해는 식사가 끝날 즈음 붉게 기운다. 구름이 융단처럼 꿈틀댄다. 장엄한 풍경에 욕심이 생긴다. 식사를 서두른다. 바깥에서 좀 더 생생하게 일몰을 맞아야지.


건물 바깥 옹벽 위에 다리를 걸치고 앉는다. 1,900m 고지답게 구름 너머 지는 해와 눈높이가 수평을 이룬다. 붉은 태양은 구름바다 위로 찬란하다. 율동과 리듬이 있는 낙조가 마치 건반을 두드리듯 옮겨 번진다. 사방이 고요한데 내 귓가에만 음악소리라 들리는 것 같다. 저 해가 구름 아래로 지고 나면 도시의 사람들은 그제야 일몰을 맞을 준비를 하겠지. 시간을 앞서 살고 있다는 흥분이 더한다.


“인생 일몰.”

당신이 말한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뒷자리에서 ‘와’하는 소리가 들린다. 식당 주방장이다. 요리사 옷을 입은 채 우리 뒤를 따라 나와 있다. 한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다.

“여기는 매일 이래?”

그가 사는 일상이 부러워 묻는다.

“너희들 오늘 운이 좋은거야.”



괜히 기분이 좋다. 당신과 내가 바란 건 일몰을 보며 식사하는 정도였는데. 한 달은 이 풍경만으로 배가 부를 것 같다. 요리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어깨를 기댄 채 그 빛이 사라지는 걸 감상한다. 이곳에서 일하며 사는 그보다 여행자로 머무는 당신과 내가 조금 더 행복하다 생각한다.


붉은 빛이 아스라할 즈음 숙소로 들어온다. 객실에 오르려 계단을 향하는데 식당 안이 보인다. 중년 부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유카타를 입은 그대로 맥주잔을 부딪치고 있다. 가끔씩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해 진 하늘을 바라봤지만 시선을 오래 두지는 않는다. 곧 자신들의 식탁으로 돌아와 가벼운 수다를 떨다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인생에 있어 일몰이나 낙조 따위,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는 걸 뭐 하는 태도로. 우리는 조금 전까지 ‘인생 일몰’을 봤다고 좋아했는데. 현지인보다 낫다고 의기양양해 했는데.


'쳇, 인생에 있어 맥주 따위,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실 수 있는 걸 뭐.'

우리는 뒤늦게 맥주를 사서 계단을 오르며 조금 더 투덜거린다.




#여행의사물

#맥주

#여행의 휘발유

이전 02화 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