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숙소를 나와 명화의정원(garden of fine arts)으로 가는 길이었다. 교차로 어딘가에서 버스를 내린다. 당신과 나는 조금 걷기로 한다. 비가 조금씩 날렸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피하지 않아도 좋을 딱 그 만큼의 비다.
의기양양하게 우산 파는 편의점 앞을 지나친다. ‘オグラ(오구라)’라는 이름의 단정한 이발소를 지나친다. 호기심 많은 당신은 한걸음 앞서 걷는다. 그리고 불쑥, 길가에 있는 어느 가게 문을 연다.
세 평 남짓한 골동품점이다. 자그마한 가게 안쪽에는 파티션을 두른 작업실이 있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을 떠올린다. 시즈쿠와 세이지는 시로 할아버지의 골동품 가게에서 만났었지.
기대 섞인 환상은 금세 무너진다. 벽시계를 수리하던 주인장은 너무 젊다. 그는 우리와 가볍게 눈을 맞추고는
제 작업에 열중한다.
작업실을 제외하면 남은 공간은 온통 낡은 물건들이 차지한다. 낡은 의자와 낡은 책상, 트랜지스터라디오, 외
딴 서랍, 어딘가에서 분리한 마차 바퀴 등이 모순되지만 두서없이 지금 아닌 먼지를 얹고 가지런하다.
당신은 좁은 공간 안을 잔걸음과 게걸음으로 옮겨 다닌다. 목각인형 하나를 들었다 놓았고, 작은 목기 하나를 들어 꼼꼼하게 살핀다. 마치 그 안에 가게의 나이테라도 새겨진 듯.
‘안도 다다오가 지은 명화의정원이 코앞인데...’
나는 심드렁하니 바깥으로 나온다. 이제 그만 가자는 표시다. 잠시 가게 앞을 서성이다 다시 안으로 고개를 돌린다. 당신은 여전히 그 작은 가게에 빠져 있다.
‘그래, 너의 여행이기도 하니까.’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스른다. 그러고는 창 너머로 당신을 관찰한다. 당신은 자리를 옮기더니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청동 주전자를 들어 만지작거린다. 어느 세월을 견딘 노부의 사연이라도 담긴 듯, 손가락을 오므려 두드리고 뚜껑을 열어 안까지 꼼꼼하게 더듬는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후에도 눈동자를 굴리며 옆에서 옆으로 다
음 사연을 채집하러 나선다. 어찌나 진지하던지.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당신은 또 조금 생경하다. 익숙해진다는 건 편안하다는 것이고 낯설지 않다는 것이며 놀랍지 않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미 알고 있다는 편견의 출발점일 것이다.
그때 창가에 쓴 손 글씨가 당신과 겹친다.
‘매입하고 있습니다(買い取りやってます)’
나는 혼자 피식 웃고 만다. 낡고 오래됐으며 적당히 먼지가 낀, 그럼에도 누군가는 선뜻 손을 내밀만한 가치가 있는 것. 내가 이 작은 골동품 가게에 남길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주머니를 뒤진다. 일본에서는 100원짜리 동전만도 못할 100엔짜리 동전 몇 개가 나온다. 가방 안에 든 건 한글 소설 한 권과 지난여름 브리즈번에서 산 지갑과 교토 지도 한 장이 전부다. 하기야 여행자에게 낡고 오래 된 물건은 제 몸 말고 무엇이 남을까. 연인의 유산이란 그 유치한 사랑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당신은 못내 아쉬워하며 골동품 가게를 나온다. 우리는 다시 같이 걷는다. 이번에는 모네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비친의 가짜그림이 걸려 있는 명화의정원을 향해.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췄을 때는 동네 할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휘파람을 불며. 호기심 많은 너는 어김없이 한 걸음 앞서 걷는다. 나는 재빨리 할머니의 사진 한 장을 찍는다. 괜히 그 모습이 미래에서 온 당신인 것 같아서.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지나간 것도 같아서. 오늘의 기억이 언젠가 우리가 꺼내어 볼 낡고 오랜 골동품이 될 것 같아서.
#여행의사연
#관찰
#흩어지는것들을간직하는방법_되도록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