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May 29. 2023

콘텐츠의 힘, 재발견 아닌 늦은 발견

2023.05.27._롱블랙 : 원계홍

어떤 작가와 작품은 시간이 지나 재발견되곤 합니다. 우연히 발견되는 것 같지만 우연은 없습니다. 콘텐츠가 가진 힘이 그저 뒤늦게 발견되는 것뿐이지요


※'플랫화이트X어제의롱블랙'은 구독서비스 롱블랙(www.longblack.co)의 노트 가운데 ‘공간과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를 선별해 여행작가의 시점으로 블렌딩합니다. 롱블랙과는 무관합니다.


<성곡미술관 야외조각정원은 원계홍 전을 보러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성곡미술관>


사람 없는 에드워드 호퍼, 원계홍

<그 너머,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롱블랙에서 읽었습니다. 작가의 전시는 지난 5.21까지였습니다만 전시 기간을 6.4까지 연장했어요. 이 정도로 화제가 될 거라고는 성곡미술관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미술 애호가인 BTS 리더 RM의 영향이 적지 않았겠지만, 무엇보다 원계홍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힘이 있었습니다.


롱블랙 노트를 읽고 그 주말 곧장 전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본 원계홍의 그림은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색채와 형태의 강렬함이 있었어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 없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아.”


<'그 너머,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의 전시 포스터. 전시는 6월 4일까지 연린다.    ⓒ성곡미술관>


아내 또한 제 말에 동의하더군요. 저희 같은 이들이 적잖았어요. 마침 서울시립미술과 서소문본관에서는 에드워드 호퍼 전이 한창입니다. 하지만 원계홍의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와는 다릅니다.(원계홍 작가는 폴 세잔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사람 없는’의 차이를 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의 정서)가 있습니다. 원계홍의 그림은 이미지 그 자체에 집중해요. 골목과 건물과 창과 문이, 색과 면과 선의 기하학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그린 1970년 풍경이 이국적인 건 그런 연유일 테고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글귀가 이를 한층 더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균형이 잡혀 있고 색채가 조화되어 있으면 작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주제 같은 것은 필수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주제이매
아름다운 것에 영원한 기쁨이었다.

전시는 부러 작품을 구분하거나 경계 짓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 나가요. 작가는 붉은 색을 즐겨 썼는데요. 그 탁하고 맑은 붉음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요. 전체로 붉다가, 그 색이 하나의 포인트로 줄어들고, 다시 다음 그룹으로 이어질 때는 건물과 지붕 등의 조형미로 잇댑니다.  작품을 배치하고 나열한 방향이 적절해 지루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죠.


<두번째 개인전이 열린 공간 화랑에서 원계홍 작가>


작가 원계홍과 소장가 김태섭

롱블랙은 허유림 큐레이터와 같이 원계홍 전시를 들려줍니다. 작품 소장가인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도 인터뷰했어요. 원계홍 작가는 김태섭 학장이 지켜내고 불러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원계홍 작가는 1923년 생입니다. 올해가 태어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쉰다섯 살인 1978년에 에 첫 전시를 했어요. 미술협회 회원이 된 1950년을 기준 삼아도 근28년에 걸린 셈이죠. 1979년에 두 번째 전시를 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전시가 끝난 1980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나이 쉰일곱 살이었습니다.


<성곡미술관의 '그 너머,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모습, ⓒ박상준>


그의 작품 대다수를 소장한 김태섭 학장은 원계홍 사후인 1989년에 그의 그림을 만납니다. 부암동에 집을 보러 갔는데 그 집이 마침 원계홍 작가의 집이었어요.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아내 민현식 씨가 집을 내놓은 상태였습니다. 김 학장은 집을 보러 갔다 방 한쪽에 있는 ‘기 막힌 그림’에 반해서, 집과 그림 200여점을 구매합니다. 그는 그림을 갖기 위해 집을 구매했다 말합니다.  


“감정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과장하지 않죠. 덤덤하고 이성적입니다.
대상을 한참 보다가 해체하고, 다시 해석하는 작업을 거쳐 이 장면이
왜 아름다운지를 표현했어요.(김태섭, 롱블랙 인터뷰 中)”


원계홍 편의 롱블랙은 트렌드나 인사이트를 말하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원계홍이라는 잊혀졌던 작가와 그를 지켜 다시 살려낸 소장가의 사연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와 작품은 시간이 지나 재발견되곤 합니다. 우연히 발견되는 것 같지만 우연은 없습니다. 콘텐츠가 가진 힘이 그저 뒤늦게 발견되는 것뿐이지요. 그 힘이 약하다면 잠시 반짝하고 금세 잊힙니다만, 원계홍 작가는 쉬이 잊혀질 것 같지는 않네요.


<원계홍의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좌)과 장충동1가 뒷골목(우),     사진출처: 성곡미술관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_주명덕 >


참, 원계홍 작가의 그림을 보고 나서 제가 처음 한 행동은, BTS 알엠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거였습니다. 이전부터 이우환, 김환기, 윤형근, 전영주 등 그의 컬렉션을 신뢰하는 편인데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가 추천하는 전시를 따라가 봐도 좋겠다 싶어졌습니다. 원계홍 작가의 작품이 ‘큐레이터’ RM을 재발견하게 한 거죠. 발견이 발견으로 이어지는 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 롱블랙에는 없는 이야기



1.초록 대문과 빨래가 있는, 사람 있는 ‘지붕’

<원계홍 작가의 '지붕',  ⓒ박상준>

김태섭 학장은 롱블랙 인터뷰에서 요즘은 그의 미완성 작 <북창동길>이 좋다 말합니다. 아마도 미완성이어서 작가를 살아 있다 느끼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해요. 그 작품이 원계홍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말하는 듯하지 않았을까요? 이제는 원계홍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김태석 학장의 소임이기도 할 테고요.


저는 ‘지붕(1978)’이 인상 깊었습니다. 원계홍 작가는 붉은색을 즐겨 사용하는데요. 이 작품은 중앙에 초록 대문이 시선을 끌어요. 그리고 왼쪽 상단 귀퉁이에는 자그마하게 빨래가 걸린 풍경이 보여요. <그 너머,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작품 가운데 찾은, 유일한 사람의 흔적이었어요.

이 그림을 그린 날의 원계홍 작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요. 평소와는 다른 한가운데의 초록색의 대문, 그리고 구석에 보일 듯 말 듯하게 남겨놓은 사람의 흔적. 그러고 보니 그의 풍경 작품에는 창과 문이 비교적 자세히 그려집니다. 조형미와 균형감일 수 있겠지만 왠지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도 합니다.



2.대그룹 회장의 집과 정원이었던 미술관

<김성곤 쌍용 그룹 전 회장의 집&정원이었던 성곡미술관   ⓒ박상준>

전시를 보고 나왔을 때였습니다. 곧장 미술관을 떠나는 이들을 보며 그들의 손을 잡아 끌고 싶었습니다. 저기 야외조각정원은 꼭 들러야 합니다, 하고 말이지요. 성곡미술관은 공간만으로 충분히 다녀올 만합니다. 이때 공간은 미술관을 포함한 야외조각정원까지입니다. 서울 미술관 가운데 이만한 정원을 가진 곳은 없습니다. 더구나 대그룹 오너가의 집과 정원을 들여다본다는 사실 또한 호기심을 자극해요.


성곡미술관은 1995년 문을 열었습니다. 원래 쌍용그룹의 창업주 김성곤 전 회장의 집으로 지었습니다. 쌍용은 한때 재개순위 6위까지 올랐어요. 성곡은 김성곤 회장의 호이기도 하고요. 이를 미술관으로 개방했으니 정성스레 가꿔진 정원이란 걸 어렵잖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서울 도심에 세계적인 작가 아르망, 구본주, 성동훈 등의 작품을 갖춘 약 4,900㎡의 조각정원이라니요. 심지어 미술관으로 개관한 지 만 28년이 지났어요. 정원의 깊이는 세월과 비례합니다. 그러니 성곡미술관의 야외조각정원이 얼마나 깊은 숲인지 알 수 있어요.


<성곡미술관 야외조각정원의 카페(좌)와 세계적인 작가 아르망의 '익스프레시시모expressissimo(우),  ⓒ박상준>

정원은 작은 언덕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고 20여개의 작품과 100여종의 수목들이 너른 그늘을 드리웁니다. 금세 도심의 소란이 멀어지고 심지어 미술관의 존재마저 잊힙니다. 예전에는 이 정원을 무료로 개방했습니다. 지금은 미술관 관람객(유료)에 한해 개방합니다. 산책로 중간에 머물러 쉴만한 벤치들이 있습니다. 그 위치가 무척이나 한적하고 고요해요. 데이트 장소로 제격입니다. 정원 가운데는 카페가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운영을 멈췄지만, 카페 노천에서 커피를 마시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3.성곡미술관 옆에서만 20년, 카페 커피스트

<성곡미술관 옆 커피집, 커피스트   ⓒ박상준>

커피 한 잔의 아쉬움은 커피스트에서 달래세요. 성곡미술관 입구 건너편에 있는 카페입니다. 2003년 문을 열었으니 20년을 맞이하네요. 제가 처음 찾은 게 2007년이니, 제 기억에서만 15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카페입니다. 성곡미술관 정원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커피 맛을 증명합니다.


커피스트는 조윤정 바리스타가 운영합니다. 종종 ‘서울 3대 커피’라는 글이 보이는데요. 그만큼 커피 맛이 좋다는 뜻이겠지요. 단골이 많아 늘 사람들로 붐비는 편입니다. 오랜 시간 ‘살아 남은’ 카페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성곡미술관이 보이는 커피스트의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 즐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2023.05.27_롱블랙 읽으러 가기

원계홍 : 55세에 데뷔한 뒷골목 화가, 산동네와 변두리를 기록하다

이전 08화 도쿄 '경의선숲길'의 대표 선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