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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un 17. 2023

음악이 없는 카페 타피로스tapirosu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쿄 여행(2023.05.10~16)

노(老) 바리스타는 부스럭부스럭 주문한 메뉴들을 만들고 있어요. 자그마한 공간에 그의 움직임만이 속닥대듯 메아리칩니다. 그제야 알았어요. 이 카페, 음악이 없습니다. 주방 쪽에는 기타가 장식처럼 놓여있지만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았어요.




우리가 사는 감각의 제국


음악은 힘이 셉니다. 말보다 강력해요. 스타벅스는 진즉에 이 사실을 간파했어요. 스타벅스에 흐르는 음악은 계열사 ‘히어뮤직’이 선곡합니다. ‘친구에게 추천할만한 노래‘를 매달 한 차례씩 선별해 전 세계 모든 스타벅스에서 플레이리스트를 보내죠. 서울과 도쿄 그리고 뉴욕의 스타벅스 어디를 가더라도 친숙함을 느낀다면, 그건 음악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 롯폰기 대로 변에 위치한 카페 타피로스,  ©박상준 여행작가 >

     

지난 3월에 우연히 *음악 듣다 책 산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유튜버 때껄룩 TAKR A LOOK의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플레이리스트가 <인간 실격>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글이었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를 주제로 큐레이션한 때껄룩의 플레이리스트는 현재 411만 명이 조회했습니다. ‘직전 해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인간 실격>의 판매 요인을 알 수 없었는데, 바로 이 플레이리스트 때문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쿄에 가기 전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도쿄다반사에서 낸 <도쿄디깅 (Tokyo Diggin) 플레이리스트 가이드북>도 그 중 한 권이었습니다. 도쿄 산책과 음악이 주제인 책이었어요. 도쿄다반사는 ‘도쿄의 문화와 음악을 주제로 콘텐츠를 만들고 전하는 기획팀’이죠. 그들이 선택하는 음악은 공간을 다르게 또는 다시 느끼게 해줍니다.


예를 들면 아오야마의 산책 명소를 걸으며 들을 수 있는 재즈와 시티팝 리스트를 추천해요. 아오야마는 역사 깊은 재즈 클럽 ‘Blue Note Tokyo’가 있고 왠지 70~80년대 시티팝과 잘 어울리니까요. 네즈미술관 정원을 거닐거나 킷사텐 츠타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카즈마사 아키야마의 ’Mother Eyes–Estate’나 카시오페아의 ‘Touch The Rainbow’를 듣는 상상을 하며 책을 읽고 여행을 준비했어요.



<도쿄다반사의 '도쿄디깅'과 때껄룩의 유튜브>


음악이 없는 카페라니요


**다윈은 동물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내는 소리를 모방한 것이 음악이라고 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나 허버트 스펜서는 '강조된 언어‘를 음악이라 했고요. 해석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건 그 리드미컬한 진동과 파장이 심장을 두드리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7일간의 도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카페는 조금 달랐습니다. 탁월한 플레이리스트가 아니라 텅빈 플레이리스트로 매료했습니다. 롯폰기힐즈 지나 츠타야서점 가는 길이었습니다. 츠타야서점 안에 스타벅스가 있었지만 작고 개성있는 카페에서 쉬고 싶었어요. 마침 6차선 대로변 옆 골목 입구에, 계단으로 이어진 2층 작은 카페가 보였습니다. 손 글씨로 쓴 ‘自家焙煎珈琲(자가 로스팅 커피)’라는 간판을 보고는 여기다 싶었습니다.


< 손글씨 간판과 벽 가득한 종이 그림이 카페 타피로스의 정체를 보여준다,  ©박상준 여행작가 >


카페에 들어서자 노(老) 바리스타가 맞이해주었습니다. 그의 주름이 카페에 대한 믿음을 더했어요. 막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4시 경이었습니다. 카페 안에 손님은 저 한 사람이었어요.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드립커피와 시폰케잌을 주문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는데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오싹한 적막감이라고 할까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봅니다. 노(老) 바리스타는 부스럭부스럭 주문한 메뉴들을 만들고 있어요. 자그마한 공간에 그의 움직임만이 속닥대듯 메아리칩니다. 그제야 알았어요. 이 카페, 음악이 없습니다. 주방 쪽에는 ***기타가 장식처럼 놓여있지만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았어요.


어색해요. 공간의 울림은 있는데 음악이 없는 카페는 긴장감이 감돌아요. 저는 다시 몸을 돌려 앉아 창밖을 바라봅니다. 간간이 바깥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음이 위로가 되요. 얼음장 같은 침묵을 흐트러뜨리죠. 사거리 남서쪽에는 츠타야 서점과 노천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풍경이 영화처럼 비현실적입니다.


< 카페 주인장이 색종이로 그린 작품들,  ©박상준 여행작가 >


시간은 서두르지 않는다


사거리 신호등이 다시 빨간색으로 바뀝니다. 차들이 줄줄이 멈춰섭니다. 거리의 소음이 잠시 멎습니다. 카페 안에 고요가 한층 깊어집니다. 진공의 시간이 흘러요. 분명 짧은데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그제야 카페 안의 세밀한 소리가 들립니다. 예를 들면 괘종시계의 시계추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것 말이죠.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처음에는 적막 가운데 찾아온 시계소리에 기가 눌렸습니다. 그 소리가 심장을 울려요. 초조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시간이 나를 쫓는 듯해요. 여행이 망각케 한 죄의식을 자극하죠. 왠지 서둘러야만 할 것 같아요. 다행히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움직입니다. 거리의 소음 속으로 시계소리가 묻힙니다.


그도 잠시, 신호가 바뀌자 또 소리가 멎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공기에요. 서서히, 메트로놈처럼 단정한 박자가 심장 박동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해요. 차츰 안정을 찾습니다. 시간이 한 뼘 더 흐르자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편안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창밖이 보이는 카페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그날 내내 카페 타피로스(topirosu)에서 들은 괘종 시계 소리가 떠나지 않았어요. 똑딱, 똑딱, 정확히 같은 간격을 오가는 일정한 움직임이었어요. 시간은 공평하다는 선언 같았어요. 시간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귀띔 같았고요. 다음 날, 다음 날도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짙은 여운이 남았습니다.  


< 카페 타피로스가 선물한, 나른한 일상의 오후,  ©박상준 여행작가 >

     

괘종시계 ‘음악이라는 습관’을 가리키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우리말샘 국어사전에는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 음파가 귀청을 울리어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동, 음파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띄네요. 이 정의를 빌리면 소리는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기의 움직임’을 느낀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카페 타피로스에서 공기의 움직임은 미세하지만 다채로웠어요. 일상을 깨우는 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음악 또한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곧 그보다는 적막을 견디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는 걸 알았습니다. 느긋하게 자신을 마주한다는 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켜요. 고독과 맞닥뜨리기 싫고 외로움을 느끼기도 싫으니까요. 물론 음악은 더 깊은 안락과 평안을 돕기도 합니다.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해요. 하지만 ‘음악이라는 습관’은 때로 그 모든 것을 미화하거나 삭제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죠.

     

카페 타피로스의 침묵은 조금 달랐어요. 음악 대신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들으며, 제가 창밖으로 본 것들은 이러해요. 도쿄의 빌딩 위를 날으는 비행기, 꽃을 안고 길을 걷던 중년의 여성(포장만으로 그 꽃은 선물이 아닌 일상의 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저녁 테이블 위에 화사하게 꽂혀 있겠죠.), 엄마 앞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어린 남매의 장난스런 뜀박질, 이런 풍경을 보며 서서히 괘종 시계 소리에 적응했죠.


<시간이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 카페 타피로스,  ©박상준 여행작가 >


브랜드, 삶의 감각을 일깨우는 친구


카페를 나오기 전, 적어도 여행 동안만은 앞서 가는 시간을 쫓지도,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지도 말자 결심했어요. 타피로스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오늘치 목적지를 절반 밖에 돌아보지 못해 초조했거든요. 여행의 시간이 나를 여행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새해의 다짐’으로 책상 앞에 붙여두었던 김수영 시인의 ‘봄밤’의 한 구절을 상기했습니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저는 다소 감성적인 인간이라 이런 것일 테고요. 누군가는 온전히 커피에 집중할 수도 있어요. 커피의 향, 입안에서 퍼지는 맛의 조화, 몸 안으로 스미는 사르르한 감각의 전이를 느낄 겁니다. 한 모금씩 스스로의 몸 안으로 흘려보내며, 번잡한 머릿속을 멍하니 비워내겠죠. 아마 모두가 각자의 고요와 마주하게 될 겁니다.

 

카페를 나오기 전 짧은 일본어로 ‘왜 음악이 없나요?’하고 바리스타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답하더군요.


어디에나 음악은 있어요.
그러니 이런 카페 한 곳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모차르트는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고 했다죠. 음악이 끝나는 곳에서 삶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감각의 시대라고 합니다. 많은 브랜드가 오감을 자극하므로 기억되려 합니다. 그런데 카페 타피로스는 시대를 '역행'합니다. 당연한 것을 비워내므로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브랜드가 감각을 빌려 전하는 건, 자신들의 철학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비와 무관한 삶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어도 좋을 듯합니다. 적어도 친구가 되고자 한다면 말이죠.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희소 가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게 마음을 움직이는 일, ‘공기의 움직임’을 전하는 방법이겠죠.





※ 自家焙煎珈琲 カフェ・タピロス - cafe tapirosu

   Tokyo, Minato City, Roppongi, 6 Chome−8−28 宮崎 ビル 2

   https://goo.gl/maps/BcQPNXD3bxqVdGfw5



*기사 출처 https://www.chosun.com/4AC547N6EFAH3HXIZ3ZDH4RFRE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을 참조했습니다.

*** 카페 타피로스의 주인장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노래하던 '세미프로 싱어송라이터'라고 합니다. 카페에 있는 종이 그림(색종이를 오려 붙인)은 그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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