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쿄 여행(2023.05.10~16)
네슬레가 블루보틀 인수 후 첫 매장으로 산겐자야점을 결정한 건 우연일까요. 우연일 수도 있고 전략일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한 건 센겐자야점 이후 블루보틀의 변화입니다. 바로 로컬라이징에 기반한 헤리티지의 강화입니다.
이번 도쿄여행에서 딱 한 곳의 블루보틀에 다녀왔습니다. 2017년 10월에 문을 연 산겐자야점입니다. 센겐자야점은 글로블 브랜드 네슬레가 블루보틀을 인수하고 처음 문을 연 매장입니다. 지역에서 50년 동안 운영한 진료소를 리뉴얼했습니다. 의사의 아들이 조 나가사카(스케타마 건축사무소)에게 의료했습니다. 맞습니다. 블루보틀의 공간 디자이너인 그 조 나가사사카입니다.
건물 기초 리모델링은 이미 3월 초에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누가 입주할 거냐만 남았던 거죠. 건축주는 ‘동네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될 만한 임대’를 원했습니다. 이를 조 나가사사카가 블루보틀에 전해 입점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 나가사카의 스타일은 살아 있는데 이전 블루보틀과는 조금 달라요.
네슬레(블루보틀) 또한 그걸 모르지는 않았겠죠. 그럼에도 네슬레가 블루보틀 인수 후 첫 매장으로 산겐자야점을 결정한 건 우연일까요. 우연일 수도 있고 전략일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한 건 센겐자야점 이후 블루보틀의 변화입니다. 바로 로컬라이징에 기반한 헤리티지의 강화입니다.
젊은 오너가 연륜 있어 보이고 싶을 때 하는 기본적인 스타일링이 있습니다. 수염을 기르거나 유서 깊은 양복점의 맞춤형 수트를 입는 거죠. 카페도 다르지 않아요. 역사가 있는 공간을 입는 겁니다. 더구나 아시아 시장에서 ‘헤리티지’는 한층 무게가 있잖아요.
블루보틀이 로컬라이징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건 아닐 테지만, 정서적인 유대감이나 친화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 스타벅스가 편한 동네 친구라면 블루보틀은 쿨한 동네 친구랄까요. 또한 2002년 창업했으니 1971년 창업한 스타벅스와 역사를 견주기는 버겁고요. 50년 진료소는 이를 보완합니다. 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장소가 그 정체이니까요. 시크함보다는 편안함에 가까워요.
무엇보다 50년 동안 이어온 친근함이자 보살핌이 있어요. 자연스레 헤리티지가 생겨납니다. 더구나 건축주는 동네 의원으로서 공간의 정체성을 이어갈 매장을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블루보틀 산겐자야 점은 이제 힙한 브랜드를 너머, 깊이 있고 친근한 브랜드, 좀 더 다양한 층을 아우르는 브랜드가 되겠다는 네슬레의 출사표처럼 다가옵니다. 진료소와 블루보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네슬레와 블루보틀의 만남을 상징하기도 한 셈이죠.
산겐자야 이후 그 경향은 한층 본격화됩니다. 다음 해인 2018년 블루보틀은 일본의 역사 도시 교토에 첫 매장을 엽니다. 역시나 난젠지(南禅寺) 가는 길에 있던 마치야 스타일의 100년 된 찻집을 개조했습니다. 마당은 흰 모래를 깔아 난젠지 호조정원을 연상케 했고요. 산겐자야의 헤리티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지요.
그해 12월 도쿄에도 새로운 블루보틀, 칸다 만세이바시 점을 선보였습니다. 칸다 만세이바시는 칸다 강 옆에 있는 아치형 육교형 철로로, 1943년까지 역으로 쓰였던 곳이 도시 재생으로 거듭났죠. 100년 된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장소입니다. 육교 하부에 블루보틀 최초의 테이크아웃 매장이 들어섰고요.
2019년에는 교토 2호점, 블루보틀 교토 롯카쿠 카페를 엽니다. 역시 전통가옥 마치야 형태로, 이번에는 100년 된 츠지무라 자전거 가게에 카페를 열었어요. 건물 측면에는 간판이 걸릴 자리에 오래 된 자전거 한 대를 걸었어요. 물론 그 사이 일본 곳곳에 전형적인 블루보틀의 미니멀한 매장도 문을 열기는 했습니다만, 산겐자야점의 전략이 헤리티지의 축을 만든 셈이죠.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요. 2019년 성수점과 삼청동점을 오픈했는데요. 공식 1호점은 본사와 로스터리가 결합된 성수점이었습니다. 성수점은 성수동 공장을 상징하는 붉은 벽돌 타일을 사용했습니다. 내부 역시 공장지대를 감안해 콘크리트를 노출하는 등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추구했어요. 조 나사카사는 외관뿐 아니라 내부에도 ‘역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벽돌로 가구를 만들었다 말합니다.
반면 2호점 삼청동점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얀 벽에 파란 병 로고 달랑 하나 그려진 외관은, 해외에 처음 문을 연 도쿄 1호점 키요스미 시라카와 로스터리&카페를 떠올리게 하죠. 블루보틀의 시니어처가 된 외관 디자인입니다. 북촌이니 한옥이 되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북촌의 헤리티지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블루보틀이 최소한의 기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게 블루보틀이어야 하는 인장 말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베이직한 디자인을 택한 거겠죠. 물론 삼청동 점 옆에 블루보틀 삼청한옥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성수점을 1호로 택한 건 부동산 시세도 있었지만, 블루보틀의 헤리티지는 삼청동보다 성수동에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시 산겐자야점으로 돌아와 볼게요. 산겐자야점은 골목 안쪽 막다른 자리에 위치해, 큰길 쪽에서는 그 입구만 살짝 보입니다. 초입의 파란병 입간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카페로 변신했지만 옛 진료소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우선 2층 벽돌집 외관을 보전했고 건물 안쪽 정원도 그대로 살렸습니다. 내부는 산뜻해요. 노출 콘크리트와 화이트, 그리고 우드 톤이 조화로워요. 블루보틀의 공간 이미지를 끌어와요.
대략적인 동선은 옛 진료소를 따릅니다. 문 안쪽에 접수대가 있던 자리는 커피 바가 위치합니다. 블루보틀의 자랑인 푸어 오버라 커피를 내리는 곳입니다. 다만 다른 매장과 달리 바 뒤쪽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보통 블루보틀 매장은 사방으로 시선이 열려있는 편이거든요. 특히 커피바는 블루보틀 소통의 상징과도 같고요. 아마 진료소의 풍경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요.
커피 바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정원이 보이는 안쪽의 주 공간입니다. 노트북 작업 중인 이들이 여럿 보입니다.(블루보틀 매장답게 ‘콘센트와 와이파이’는 없습니다만) 이전의 블루보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커피바와 벽으로 단절돼 있어 프라이빗한 느낌이 나서 가능한 일일 겁니다.
입구 앞쪽 작은 마당이 특히 매력적입니다. 큰길에서 들어와 ‘ㄱ’ 모퉁이를 꺾으면 나오는 구석입니다. 건물의 입면 바로 앞입니다. 막다른 길이라 작은 빈 터가 생겨납니다. 간이의자를 내두었는데 안쪽 폴딩도어를 열면 안쪽 카페 정원까지 한눈에 보입니다. 이 자리에서 옹기종기 편하게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전보다 로컬과 정서적 유대감을 높이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서빙하는 방식도 달라요. 주문하고 나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자리로 직접 커피를 가져다줍니다. 트레이 없이 커피 받침과 커피만이죠. 격의없는 친밀을 표시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커피를 내리는 ‘푸어 오버’ 포퍼먼스가 전부는 아니라는 표시처럼 다가오기도 해요. 하긴 이제 ‘커피 맛’ 때문에 블루보틀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건 창업 초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보다는 그 공기를 맛보러 간다는 게 맞겠죠
네슬레가 블루보틀을 인수한지 어느덧 6년이 흘렀어요. 산겐자야 점이 문을 연지도요. 어느덧 국내에만 12개의 블루보틀이 자리 잡았어요. 제주와 부산에도 있습니다. 아쉽게도 슬슬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가는 것 같은(JP모건 카미요 그레코 대표)’ 느낌은 점점 옅어져 가요.
그런 의미에서 바야흐로 자신들만의 헤리티지를 앞세워 규모의 싸움을 시작한 스타벅스의 행보는, 블루보틀에게 좋든 나쁘든 자극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블루보틀이 아니라 네슬리인가요. 그래서 블루보틀이 꺼낼 다음 버전의 ‘산겐자야’가 궁금해지네요.
※ 다음 도쿄 여행 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 편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