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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석 Jun 04. 2020

한국전쟁이 전후(戰後) 미·중 관계에 미친 영향

1-Page 레포트 [2]

이번 봄 학기 정호섭 교수님(前 해군총장)의 '미중해양패권경쟁과 한국의 해양안보정책' 수업을 들으며 과제로 수행했던 1-Page 레포트 두번째다. 매시간 국가 전략을 고민함에 있어서 유익한 컨텐츠와 질문들로 구성되어 수업과 과제를 진행하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이 현재 겪고 있는 신(新) 패권 경쟁의 서막(序幕)이자 전초전(前哨戰)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과거의 역사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규모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집중적으로 견제했던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이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국의 존재감과 입지가 좁았던 것이다. 오히려 한국전쟁 이전에 미국과 중국은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견제하는 상호 협력적 국가에 가까웠다. 


이러한 두 국가에게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직접 실감하는 첫 사례가 되었다. 특히 중국은 유럽 열강에게 이미 자국 영토를 유린(蹂躪)당한 경험이 있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열세(劣勢)에 따른 패망(敗亡)이 곧 자국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전쟁의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곧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는 미군에 의해 자국의 국경선이 위협받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고자 하는 군사적 전략이었다. 두 국가의 충돌이 만든 파장(波長)은 거대했다. 미국은 중국이라는 존재감에 의해 북한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한을 쉽게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휴전(休戰)으로 한반도가 분단되며 전쟁은 마무리되었고, 미·중 양국은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베이징으로 1971년 7월에 건너가기 전까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이 각각 동북아시아에서 남한과 북한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1950년 1월 10일 공표된 애치슨 선언의 실수를 복기(復棋)하고 자국이 갖는 두 가지 핵심이익, 즉 세계 자유민주주 진영의 대표국가로서의 지위와 자국의 정치/경제적 안전 보장을 위해 보다 치밀하게 국제 관계를 고려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 영토를 방위하는 최전선으로서 남한이 갖는 의미는 미국의 핵심이익과 맞닿는 것이되었다. 또한 이는‘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과 맞물려 주한미군의 상주로 연결되었다.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어벽으로서 북한의 효용성을 체감하게 되었다. 미국은 자국의 국경선이 직접 마주하지 않는 현 방위체제의 유지가 군사/안보 및 경제적 측면에서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이해한 것이다. 물론 당시 중국은 경제와 정치 시스템이 성숙하지 못하고 소련이 보다 강력한 시기였기 때문에 국가 위상은 제한되는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이후 미중 두 국가는 1964년 중국의 핵 개발과 1960~1970년대 베트남 전쟁과 같은‘갈등 국면’과 중·소 분쟁으로 인한‘협력 국면’등 다양한 관계를 통해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 복잡한 관계는 현대에 접어들어 신(新) 패권경쟁 구도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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