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헬조선 주민입니다 2-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쩌다 헬조선이 되어버렸을까. 2020년 대한민국은 헬조선으로써 청년뿐만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 살아가기 척박한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민이라도 갈 것이 아니라면 별 수가 없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를 이룬다. 이는 헬조선의 청년세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우리는 헬조선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마침내 지옥 주민으로의 진화를 이뤄냈다.
이로써 우리는 혐오스러운 정치로부터 뉴런 신호를 차단하는 방법을 배웠고, 피곤하게 이 사람 저 사람과 엮여서 살 바에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모든 혐오와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우리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재미있느냐”, “없느냐”다.
필자는 지옥주민으로서의 청년세대, 정확히는 90년생들의 모습을 6년간의 대학생활의 경험을 빌어 말해보고자 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회부터 사회참여활동까지 나름 다양한 활동을 해봤으니 90년생들의 특징에 대해 당사자로서 나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느낀 90년생들의 특징을 크게 나눠보자면 정치 혐오, 공동체 개념의 상실, 피상적인 관계의 추구 정도로 압축된다. 그리고 세 가지 특징은 ‘파편화된 개인’으로써 다시 압축되는데, 이번 글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 혐오, 공동체 개념의 상실 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80,90년대에 들어 세대가 거듭날 때마다 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분석은 이제는 보편적이라 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 또한 같은 90년생임에도 6년이라는 짧은 대학생활 동안 이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였고, 갈수록 신입생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매년 입학시기마다 학생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학과의 공식행사에 참가하는 인원이 해마다 줄어갔으며, 그럴 때마다 기존의 행사들은 점차 유지가 어려워져 갔다.
그럼에도 개인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인 간의 성향의 차이는 인정받아야 하며, 개인이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어야 건강한 공동체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극단화되어 개인이 권리를 추구함에 있어 다른 ‘개인’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청년세대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온전한 개인주의이기보다는 이기주의적 성향을 띌 때가 많은 것 같다. 때문에 필자는 글에서 이기주의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한국은 예부터 지금까지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다. 연령에 따른 질서가 뚜렷하고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강조한다. 이 같은 유교문화 속에서 개인주의적 성향이 심화되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90년생의 입장에서 보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의 심화는 현대 한국의 문화 속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에는 무한 경쟁의식이 깔려있다. 남들보다 더 우수한 능력으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문화적인 사조는 당연히 교육에도 반영되기 마련인데 무한경쟁의 대학입시가 딱 그렇다.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의식 또한 여러 가지 관념과 사상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쓰는 근육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근육이 퇴화하듯이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자주 생각하고 쓰는 의식일수록 가치관에 선명하게 반영이 되고, 그렇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의식일수록 가치관과는 멀어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초·중·고에 걸친 12년 동안에 걸친 교육의 대서사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해”라는 얄팍한 관념뿐이다. 그리고 경쟁은 기본적으로 1인 플레이다. 협업을 통해 집단의 성과를 내는 것이 관건이 아닌, 타인과 비교하여 개인의 우위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보통 청소년기를 지나면 한 인간의 대부분의 가치관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창 가치관을 형성할 시기의 뭣도 모르는 학생들이 12년간 타인과의 끝없는 경쟁 속에서 경쟁의 근육만을 키웠으니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개인주의적 의식은 우리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는 교육과정 중 특정 과목을 배우기를 포기한 학생을 과목의 이름과 포기자의 이름을 엮어 OO포자라고 부른다. 수학을 포기하면 수포자, 영어를 포기하면 영포자 이런 식이다. OO포자 시리즈는 청년세대만의 유행어도 아니고 현장의 교육자들 또한 자주 쓰고는 하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커다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OO포자’라는 말에는 명백히 ‘포기자’라는 패배주의적 낙인이 찍혀 있다. 사람마다 잘하고 못하고 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차이를 차이로써 바라보지 않고 포기자, 패배자로서 낙인찍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자들 또한 여기에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OO포자 소리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는 너무나도 심각한 사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현대사회는 타인을 패배자로서 낙인찍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인식할 능력조차 교육이 앗아가 버렸으니까. 언젠가 싹텄을지 모르는, 혹은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공감능력을 뿌리째 뽑아가 버렸으니까.
세상에 패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필자 또한 그렇다.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공포 때문에 수능을 3번이나 치러야 했고, 졸업한 대학의 입시에서도 40, 50명 남짓의 경쟁자들을 짓밟고 나서야 홀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우리의 삶 속에 타인 또한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12년 동안 경주마처럼 앞만을 볼 수 있는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내 앞에 높인 트랙이 세상의 전부 인 줄만 알았다.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대학입시의 골인지점 뒤에 있는 것이 새로운 경쟁일 뿐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