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화된 기억

-우리의 교육에는 타인이 없다 2-


독자들에게 하나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본 글이 현재 교육과정, 정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글이 아닌, 필자 개인의 경험과 느낌을 중심으로 한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육과정이나 정책 등에 대한 자세한 평가를 원하는 독자라면 아마 이 글이 원하는 취지를 달성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으로서 만드는 일이다.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동시에 이만큼 교육에 대한 정확한 정의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받아쓰기를 시작하는 것부터, 전문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등으로 교육의 형태는 무궁무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도덕과 윤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모을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이란 응당 인간을 도덕과 윤리를 갖춘 존재로써 키우기 위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란 인간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을 보자면 이게 사람을 만들고 싶은 것인지 AI를 만들고 싶은 것인지가 헷갈릴 때가 많다. AI가 0,1로 이루어진 이진법으로 사고한다면 한국의 학생들은 점수로 사고한다. 초등학교부터 이루어지는 철저한 점수 경쟁과 좋은 점수만을 내기 위한 맹목적인 교육.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어야 할 자리는 그렇게 ‘점수화된 기억’에게 점유당하고 말았다.


교육을 통해 인간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의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필요성을 배우지 못한 인간이 저지르는 만행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다. 안하무인의 재벌부터 우리 주변의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들까지. 충분히 도덕적으로 길러지지 못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 괴물로 길러진다. 끊어지지 않는 학교폭력 문화 또한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필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초, 중, 고,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의 과정에서 타인이 배제된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중 첫 번째로 다루게 될 과정은 초등학교이다. 초등학교를 나머지 과정에서 분리해 따로 설명하는 이유는 교육에 대한 책임 소지의 차이에 있다.


초등교육 과정은 무엇보다 부모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다. 초등학교에서는 생각보다 타인의 존재에 대해 배울 기회나 시간이 많다. 정규 수업시간에도 아이들끼리 협업이나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고, 방과 후에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취미를 개발할 수 있는 방과 후 활동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필자와 같은 경우 과학상자나 움직이는 레고를 만들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이를 활용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도 부모에 의해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아이를 사교육의 장에 던지는 실수를 저지른다. 부모의 욕심에 의해 학원으로 보내 진 아이들은 학교의 교실보다 좁은 닭장 같은 공간에서 자신을 인간이 아닌 점수로 치환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학원에서 매주 갖가지 테스트를 보게 된다. 자신의 테스트 점수가 공개적인 위치에 붙기도 하고, 자신의 점수에 따라 자신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학원 선생과 부모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을 하나의 거대한 숫자로 서서히 받아들여 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아이들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상실하게 되고 수학 올림피아드 몇 등, 반에서 몇 등 따위의 숫자들이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인간의 정체성이 아주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과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런 복잡한 것들을 단지 몇 개의 숫자들로 치환하려는 행위는 그 사람의 인격을 박탈하려는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너무 광범위하게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의 문제의식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보기 위해 하나 예시를 들어보자.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받아쓰기를 해본 경험이 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말한다. “너 요번 받아쓰기에서 80점 이상 받아오면 엄마, 아빠가 너 가지고 싶은 거 사줄게.” 이때 부모들은 보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자녀의 ‘점수’일까 아니면 그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 증가’일까. 아마 양쪽 모두 이리라. 하지만 십중팔구 둘 중에 방점은 점수에 찍혀 있을 것이다. 왜냐면 부모들조차 점수를 통해서만 가치를 해석할 수 있게 교육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는 “내가 언어적 능력을 길러야겠구나.”가 아닌 “내가 높은 ‘점수’를 받아야겠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받아쓰기를 하는 목적은 자녀가 보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타인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 의해 자녀에게서 목적에 대한 이해는 지워지고 그냥 점수 하나로만 기억되고 마는 것이다.


부모는 받아쓰기를 통해 아이에게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과 이 아름다움을 타인과 어떻게 나눌 때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지를 가르쳐야 한다. 점수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만약 자녀가 자신의 부모를 소득 수준에 따라 “우리 아빠는 OOO만 원짜리 아빠, 엄마야.”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점수로 파악하는 천박한 태도부터 버리고 아이에게 교육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받아쓰기 외에도 비슷한 예시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식으로 교육의 목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점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우리에게 일상화된 현실이다. 다행히도 초등학교의 교육현장에서는 이와 같은 태도가 중등, 고등, 대학 과정에 비해 훨씬 덜하다. 아이들이 교육의 의미를 다양한 형태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한 기회가 많다. 문제는 아이들에게서 있어서 어쩌면 무언가를 자유롭게 생각해 볼만한 이 기회마저도 증발시켜 버리는 부모의 태도에 있다.

초등교육시기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시기가 앞으로 아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소 고등교육 시기부터 성인기의 태도까지 초등교육시기에 형성된 아이의 정체성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필자의 경험으로 초등학교 때 아이들을 괴롭히던 아이들은 최소 고등학교까지는 그 태도를 이어간다. 시기에 따라 괴롭히는 정도에 차이가 생길 수는 있어도, 중간에 태도의 본질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아이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출저: 원주신문 '학교폭력 피해 호소... 어느 학교가 많았나?'

아이들은 초등교육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종종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고는 한다. 이때부터 반에서 왕따가 생기거나 싸움이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처음 이런 행동을 보이기 시작할 때 이는 그 아이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타인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중등교육 시기부터는 다르다. 이 시기부터는 이해의 정도에 성인과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행동이, 왜 나쁜 것이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 얼추 이해하기 시작한다. 만약 초등교육시기에 타인에 대한 예의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다음 시기부터는 무엇이, 왜 나쁜지를 알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정말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돼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모나 학교 모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학교의 교육자들은 교내에서 폭력 사건이나 왕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필자가 학교를 다녔을 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계속 왕따를 당한 친구가 있었는데 졸업까지 몇 번이나 그 친구와 같은 반을 지냈지만 그 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왕따가 아닌 적이 없었고 그 기간 동안 그 친구를 위해 선뜻 나서는 교육자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그 친구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몇 대 안 되는 회초리를 때리는 것 정도에 그치고는 했다. 그렇게 해서 바뀔 아이들이었으면 진즉에 바뀌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왕따 문제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폭력의 본질, 관계에서 초래하는 문제 등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관리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다른 아이를 괴롭혔을 때 “애들이 크다 보면 싸울 수도 있지.”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며 사건을 넘어기거나 역으로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려 든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보호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녀가 반성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를 빼앗아 간 것이다. 자녀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 부모 자격 실격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자녀가 다른 아이에게 표출한 폭력 속에는 자녀가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녀의 행위에 대해 묻는 것은 자녀의 인격을 묻는 것과 같다. 인간의 인격은 아주 섬세해서 아주 자그마한 계기로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니 아주 자그마한 사건이라도 절대로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초등교육시기 자녀가 어떤 인격을 형성하는 가에 대한 책임은 자녀 자신보다는 부모에게 더 많은 책임이 쥐어져 있다.


지금까지 초등교육시기에 대한 필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청년 스스로가 청년문제를 생산해 내는 원인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부재에 있다고 앞서 밝힌 바 있다. 이번에는 초등교육시기에 맞추어 청년층의 타인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어떻게 발생하는 가를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중, 고등교육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인격이 본격적으로 점수화되는 것과 사라져 가는 공감능력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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