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8
호랑이 한 마리를 상상합니다. 장대한 기골을 섬뜩한 무늬로 덮고 있는 야만의 왕. 물어 죽이는 송곳니로 생사를 결정하는 죽음의 재판관. 세상 모든 숲이 그의 어전이며, 산들의 모든 높은 봉우리가 그의 옥좌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당신은 사슴의 피를 마시는 혀로 검은 쇠창살을 핥고 있습니다. 애타게, 마치 소중한 제 털을 다듬는 것처럼.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듯합니다.
당신은 쇠창살 안을 불안한 듯 서성입니다. 초조한 듯 벽을 긁어댑니다. 그러다 ‘찍-’하고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합니다. 숨을 쉴 때마다 출렁이는 기름 낀 뱃가죽이 짜증이 날만큼 거슬리는군요. 그러니 제가 아직도 당신을 왕이라 불러야 할까요? 스스로를 불안과 기만적인 평온 속에 방치한 그대를?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착한 집고양이 행세나 하고 있는 그대를? 아무리 비참하고, 비굴해진다 해도 세상이 모질어서 그랬다는 변명만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자신에 대한 책임감마저 버린다면 그때는 진짜 노예가 되는 거니깐.
왕이시여, 제발 그들이 주는 그릇을 핥지 마세요. 그것은 감주(甘酒)가 아닌 망각의 강물입니다. 왕이시여, 그들이 약속하는 안락함에 속지 마세요. 그들이 내주는 것은 본디 당신에게 속했던 것, 깨어진 왕관의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쇠창살 사이로 내민 그들의 팔을 잡아끌며 이렇게 말하세요. “유배되었던 왕이 돌아왔노라”라고. 그리고 죽음이 진득하게 굳은 아가리를 벌려 팔을 무참하게 찢어발기세요. 그들의 비명소리가 당신의 귀환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될 수 있도록 잔혹하게 살해하세요. 턱을 타고 흐르는 선혈의 목걸이가 다시금 당신을 왕처럼 보이게 할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마쳤다면 쇠창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차례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왕이시여,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