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Jun 22. 2022

계절의 종들

22. 06. 22

  땀 흘리는 농부가 밭의 포도알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로지 계절에 충실한 종들만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쭉정이가 되어 버려지리니, 너희는 다가올 날을 준비하라” 이에 포도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마다 계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햇빛에 볼이 발그레해진 포도알이 해를 보며 말했습니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저것은 달궈진 설탕. 나는 그 젖을 먹으며 내 안을 감미로움과 환희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말을 들은 멀건 포도송이가 중얼거렸습니다. “저것은 그저 타오르는 것. 뜨고 지는 불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거기 매인 내 생 또한 마찬가지.” 그러자 더위에 질려 얼굴이 푸르댕댕 해진 포도알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따가운 만 개의 침을 흩뿌리는 저것은 거만한 압제자. 나는 그의 끓는 폭정에 노예처럼 시달리고 있다!”   

  

  계절이 나뭇잎에 금박을 입히고 푸른 하늘이 품을 더욱 넓게 펼칠 때 농부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문 곡식들의 경배를 받으며 그들 가운데서 나아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마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모든 인내하는 자들이여 무거운 고개를 들라. 만물이 무르익은 때가 왔나니 우리 황금의 시간이 도래했도다. 내 이마를 수놓은 빛나는 땀을 보라. 이는 복된 인내의 왕관이요, 수확하는 자의 증표이다. 충실함으로 계절을 복되게 한 자에게는 상급이 있을지니, 육신은 잔 속 내 붉은 피가 되어 무거운 의무에 굴레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아이처럼 웃게 될 것이고, 씨앗은 너희 후손을 위해 약속된 기름진 땅에 심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계절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무정히 버려지리라.”     


  그리하여 농부는 밭을 거닐며 자신의 소산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포도알을 하늘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보라, 내 가장 충실한 종이 여기 있다! 너의 인내는 환희로 가득하니 내 혀에 달 것이다. 세월의 무게도  안에선 새처럼 날아오르리니 그것이 내 웃음이 될 것이다.” 그는 포도알을 바구니 속 가장 좋은 자리에 놓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멀건 포도송이를 보고는 곧 노래를 그쳤습니다. “진실되지 못한 자여, 너는 게 주어진 것들을 헛되이 흘려보냈구나. 네게는 아무런 열망이 없으니 고통도 환희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무엇으로 너를 달게 할 것이며 씨 뿌린단 말인가. 너는 계절의 방관자이며 종국에는 스스로에게마저 이방인이 되었구나. 세상 그 누구도 너를 쓸 자가 없나니.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그가 멀건 포도알을 땅에 버렸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농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축 늘어져 흉하게 주름진, 푸르댕댕했던 포도알이었습니다. “악한 자여, 너는 나의 축복을 저주하고, 스스로를 욕보였구나. 너는 가장 높은 곳에 올려졌을 때에도 떨어질까 근심만을 했으며, 은총의 비가 너를 적실 때에도 가릴 지붕이 없다 하늘을 욕했구나. 너를 들이면 내 안에서 독을 뿜을지니 버려져 마땅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흉하게 일그러진 포도알에 몸서리치며 그것을 아무 곳에나 내던졌습니다. 그러자 검고 커다란 까마귀 날아올라 그를 낚아채 갔습니다.


  수확을 마친 농부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했습니다. "기쁨으로 인내하는 자, 땀 흘려 진실을 행하는 자는 만물을 복되게 하는 자니, 만물 또한 그에게 기쁨으로 화답하리라."

이전 14화 신에 관한 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