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se Jul 21. 2024

[단상] 테라스 카페

테라스가 있는 허름한 골목 카페. 오후에 있을 회의 준비로 분주하다.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트럭의 엔진소리와 매연 냄새. 문득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2학년 여름방학. 커다란 트럭 옆자리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음료를 여러 가게에 납품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작은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였고 출퇴근 거리가 멀어 작은아버지 댁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습도는 대단했다. 힘을 쓰는 일이라 오전 나절만 지나도 몸은 녹초가 됐다. 집으로 돌아와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어 씻고 나면 피곤함에 금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반을 지냈다. 여러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 중 단연 최고의 육체노동이었다. 힘든 기억만이 남아있을 법도 한데 재밌고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다. 몸은 고됐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는 호기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하루에 집중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크게 없었다.


퇴사 문제로 회사 일이 크게 뒤틀렸던 지난겨울. 의도와 다르게 모든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17년 함께했던 동료 선후배들에대한 미안함이 컸다. 자책, 후회, 불만, 미래에 대한 걱정. 며칠 더 이렇게 지내다간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감정이 내몰렸다. 대부분의 문제는 당장에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정리만으로는 극복하기 버거워 물리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몇 가지 활동을 찾기 시작했다. 일과 관계없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렇게 새벽수영, 영어, 독서, 글쓰기 수업 등의 활동을 하나씩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중에도 꾸준히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 힘들었던 일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의 주요한 일이 되었다. 나의 관심과 에너지는 위의 활동들을 개발하고 지속하는데 쏠려있다. 실력이 조금씩 쌓이고 발전함을 느끼는 요즘이 즐겁다. 답이 보이지 않던 미래의 계획이나 회사 내의 문제를 보는 시선에도 여유가 생겼다. 기대하지 않았던 여유.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는 쌍둥이 이모가 등장한다. 경제적 안정, 명문대에 유학 중인 자식들, 좋은 직장에 다니는 빈틈없는 남편, 수준 높은 교양, 예쁜 마음 씀씀이까지. 늦게 개화하는 꽃이 그녀에겐 큰 걱정이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이모는 결국 지리멸렬한 삶을 극복하지 못하고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이겨낼 수 있을만한 고통과 상처, 번민, 궁핍은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촉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행복은 완벽한 현재나 미래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현재 마주하고 있는 것을 즐기고 집중한다면 그곳에 바로 행복이 있지 않을까. 현실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행복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 보자. 언제고 또 어려움은 갑작스레 찾아올 테니. 오전 나절, 한적한 테라스 카페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퍽 만족스럽다. 별일 없는 지금에 감사한다. 다른 것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현재의 일들에 집중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2023년 가을

작가의 이전글 [단상] 엄마, 드라이브쓰루,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