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한참 더워서 기운이 없을 때였다. 기분 전환도 할 겸, 한 번쯤은 학기 중에도 해외여행을 떠나고픈 마음에 공강을 활용해 홍콩 여행을 떠나고자 했다. 본래 어느 정도 동선이나 할 것들을 계획하고 가는 스타일이지만, 그때는 주말에 해야 할 과제를 미리 다 해야 했기에 일정을 짜기에는 너무 귀찮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보다는 적당히 힐링이나 하고 와야지..라는 생각으로 간, 처음으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 갔던 여행이었다.
홍콩 여행은 그런 상황인 나에게 적격인 여행지였다. 홍콩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쇼핑과 먹거리 정도뿐으로, 갔다 온 사람과 대화를 해봤을 때 딱히 관광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던 것 같다. 쇼핑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였기에 여유롭게 돌아다니기에는 딱 좋아 보였다. 무언가 관광지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 본능은 어쩔 수 없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보면 평소 여행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힐링을 생각하고 간 여행이었고 푹 쉬려고 살면서 처음으로 비싼 호텔도 예매를 해봤지만, 그래도 '해외'여행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비행기 값이 아까운 것도 한몫했지만 먼길에서 온 만큼 뭐라도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가이드북을 펼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라지만 내게 해외여행의 하루하루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야 하는 비용이라 그 무게감도 컸지만, 어쨌든 평소에 머무르는 동선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러 간다는 특유의 설렘 때문이지 않을까 하다. 푹 쉬어야지.!라고 다짐해도 봐야 할 것들은 분명히 있기에 관광하는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하루하루가 특별하지는 않았던 여행은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곳은 바로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자, 가장 좋아했던 유럽이었다.
3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여행이라선지, 처음에는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려 계획했었다. 이 여행을 가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했던 아르바이트, 이때 아니면 또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복합적으로 섞이니 이러한 계획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항공도 알아보고, 호텔도 알아보고, 레스토랑도 알아보고, 동선도 짜고..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어느 때보다 설렘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 나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방문한 것이었고, 0순위 여행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각 나라당 가이드북의 페이지가 상당히 빽빽했기 때문에, 유명한 곳 중에서도 더 유명한 곳만을 골라야만 했다. 그래서 30일이라는 충분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의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것 같았고, 여행의 끝을 상상했을 때 너무 아쉬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깨지는 데에는 2주면 충분했다.
매일매일 아파트 사이로만 거닐다가 처음 유럽의 건축물들을 봤을 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멋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던 분위기까지 느껴지니, 황홀하다는 감정을 그때 처음으로 느껴본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감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이 아름다운 건축물 조차도 점점 비슷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멋있다고 생각해도 더 이상 새롭지가 않다 보니 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의 설렘과 처음 건축물을 봤을 때의 그 충격은 다시는 받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프라하의 카를교 거리, 피렌체 두오모 성당, 베르사유 궁전 등 처음부터 너무 강력한 것들을 본 것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같이 온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 PC방을 가고 싶다는 친구, 집밥을 먹고 싶다는 친구.. 2주가 지난 시점에서는 유럽에서 본 것들, 먹은 것들에 대한 얘기보다는 한국에서 했던 것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던 것 같다. 나 역시 비슷했다. 뜨끈한 뼈해장국 한 그릇에 순대 한 접시가 간절했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이 여행에 대한 흥미를 푹 낮췄다고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어딘가를 꼭 가봐야겠다는 열정은 사라지고 주변에서 머물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잠시나마 아.. 그냥 20일 정도만 갔다 올걸..이라는 후회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사라지게 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새로운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소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2주까지의 시간은 매일매일이 특별한 하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 이후부터는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일상에서 빠져나온 특별한 하루가 아닌 또 하나의 일상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바라보는 시선과 원하는 여행 스타일이 처음과는 전혀 달라져 버렸다.
항상 유명한 관광지, 유명한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그 외의 것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강물 색을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고, 벽돌 하나에도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현지인들과 소통을 하는 데에도 집중을 하게 되는 등 초반이었다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 것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버스를 타기보다 그저 그 도시의 분위기에 취해 걸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던 것 같다. 굳이 유명한 무언가를 보지 않아도,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니 내 시선을 이끄는 것들은 무척이나 많았던 것 같다.
음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곳에 있는 모든 종류의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어보겠다는 다짐을 했고, 정말 많은 양을 먹어보기도 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아쉽게도 내 취향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이 훌륭한 맛을 느끼기에는 내 입맛이 너무 초등학생 입맛인지, 솔직히 한국에서 먹은 도미노피자나 군대에서 먹은 크림 스파게티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스파게티와 피자를 충분히 경험한 뒤 오롯이 내 느낌대로 골랐던 라자니아는 유럽에서 먹었던 음식 중 최고의 음식 중 하나였다. 입맛에 너무 잘 맞았는지, 어디를 가든 라자이나를 찾는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라자니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탈리아에서 하루 이틀만 머물렀다면 영영 몰랐을 음식일 것이다. 인터넷에 보았던 것들이나 가이드 북에서 봤던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평소대로 선택하다 보니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행이 진짜로 시작되는 시점은 이 순간부터라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취향을 더욱 제대로 알아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여행이 일상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대다수 사람에게 해외여행은 특별하다. 그리고 짧게 가는 여행일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길게 가는 여행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여행 속에서 또 다른 일상을 경험할 수 있고, 이때부터 진정으로 나를 위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끔씩 짧게 짧게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실망을 했거나 딱히 다시 갈 마음이 없었던 곳 중에, 조금 더 머물렀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곳도 있었을까?라고. 어쩌면 내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줬을 곳을 너무 쉽게 지나친 것이 아닐까라는 후회를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