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지마라 풀잎 잔디에서 배운다.
월드 휘트먼(1819~1892)의 문제작 <풀잎>을 읽으면 외설적인 문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 작가가 어떻게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그 과감한 통찰의 글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는 저널리스트였기에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것이 그렇게도 많았고 풀잎의 문장들은 그만큼 현실과 시인의 시선을 모두 담았기에 인상 깊다.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나는 충실한 증거들과 다른 모든 것들을 내 얼굴에 지니고 다닌다,
내 입술을 잠잠케 함으로 나는 가장 의심 많은 사람을 혼동케 한다.
나는 오랫동안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를 내 속으로 불어 넣고…… 소리들이 나를 위해 기여하게 할 것이다.
- <풀잎>, 월트 휘트먼 지음, 허현숙 옮김
월트 휘트먼은 꼭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 같은 모습이다. 수염을 깎지 않고 저렇게 기르면 로마제국 시대 오현제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의 문장들이 저 수염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에 숨 쉬는 호흡에서 그의 땀방울이 맺힌 것이 저 수염으로 옮겨붙어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월트 휘트먼의 <풀잎>은 처음 자비로 출판된 책이다. 그는 그만큼 그의 글에 확신이 있었고 그의 세계관과 문학에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범인 보통 사람으로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았던 그에게 문학은 그의 자아를 찬미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그 자신이었다.
월트 휘트먼의 문장을 읽으면 강렬함이 느껴진다. 그는 시인이었지만 그의 문장은 감미롭지만은 않은 날카로움과 냉철함이 가득하다. 그는 세상을 정의하고 해석하는데 탁월한 시인이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산책을 하면서 이 글의 메모를 남겼다.
나는 스스로를 찬미하며 노래 부른다.
내가 취하는 것은 당신도 취하리라.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는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에.
<월트 휘트먼>
초록이 가득한 공원에 둘러싸여 침묵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 말고도 온갖 경이로운 것들이 들리고 보이기에 그저 관람자의 신분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하늘이라고 할 수 없는 공중에 잠자리들이 수십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나는 것을 뽐내는 것처럼 쉴 새 없이 패턴을 그리면서 날고 있다. 그들의 날갯짓을 상상하면서 듣게 된다. 그들 중에 키 큰 나무들보다 높이 나는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잠자리들이 나무들을 공경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풀잎으로 가득한 초록공원은 눈을 맑게 해준다. 그 맑은 눈으로 콘크리트 평일의 때를 씻겨낸다.
나무들은 공원의 파수꾼이자 수호자들이다. 식물들은 공원의 무대가 되어주지만 나무들은 공원의 경계선에 묵묵하게 파수꾼이 되어준다. 그 아늑한 경계 안으로 잔디 숲 안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웃음을 흘리고 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 이상의 큰 원형을 만들어서 피크닉을 즐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즐기면서 잔디 숲에서 풍겨나는 초록 향수를 같이 마시고 있다.
초록공원의 풍경은 그대로 시 한 편이 완성되고 수필 한편을 적게 된다. 그 안에 들을 수 있는 웃음들과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들이 작가의 본색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월트 휘트만은 그의 작품 <풀잎>에서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적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많이 보고 많이 듣고 관찰하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고요한 관람객이 되어보면 보이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진다. 들리는 것을 상상하고 나만의 언어로 해독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렇게 일요일 공원에서 나와 세상을 연결시킨다.
작가로서 세상의 모든 시선들을 정의하고 싶어지고 기록하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알려준 월드 휘트먼, 그의 문장들과 산책길 초록공원들이 오버랩 겹쳐진다.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들어야 하고 그 소리들을 내 속에 넣는 작업이 성숙해져야 함을 깨닫게 된다. 소리들을 들을 수 없다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우리 내면의 소리가 세상의 소리를 바라볼 수 있음을 예찬하고 싶어진다.
월트 휘트먼은 「풀잎」에 나오는 유명한 '나의 노래'에서 풀잎을 이렇게 노래한다. "어린이 한 명이 손에 풀을 잔뜩 뜯어 쥐고서 나에게 물었다. '풀이란 무엇인가?' 하고···. 그러나, 나도 또한 어린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풀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란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저 초록 공원의 풀잎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대답은 감동이다. 저렇게 바람에 따라 일렁이고 빗물에 따라 반짝이는 작은 식물들, 흙에 의존하여 옆에 둘러싸인 풀들을 의존한 저들의 삶이 감동이다.
<호프맨 작가의 '풀잎 잔디숲'>
잔디 위 앉으면 안 된다
잔디 위 걸으면 안 된다
뭐 그런 경고 마구 무시한 적 있지요
대신 잔디를 손으로 만져보세요
촉촉하게 젖은 잔디가 온몸으로
부르짖음을 만져보세요
이렇게 욕심 바람 없이 살아요 이슬만 먹고 살아가요
밟아도 뭉개어도
무너지지 않아요
새벽까지 견뎌내고 물먹은 초록빛으로
다시 반짝이면 되지요
그거면 족해요
더 이상 바라는 것 없어요
모두에게 푹신하다는 것
빗질 안 해도 위로 뻗어있으려 한다는 것
새들도 곤충들도 반기는 잔디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을
그런 잔디 만져주세요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셔요
잔디는 기울어질 뿐이지 절대 쓰러지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잔디는 밟아도 짓눌려도 다시 굳세게 살아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잔디는 부르르 떨지라도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기에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잔디를 손으로 매만져 주지 못한 것이
밟기만 해온 것이 오만하였습니다.
잔디는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메말라가도 견뎌냅니다.
가장 낮은 식물이기에 속상해도 버텨냅니다.
오로지 새벽이슬 먹고 자랍니다.
어쩌다 오는 빗물에 감사할 줄 알기에 반짝이는 윤슬을 머금어 봅니다.
겨울에 잠시 노랗게 물들이지만, 봄을 준비하였던 겁니다.
봄부터 초록빛 머금어 이슬 한 모금이면 생명력을 뽐내어 봅니다.
잔디는 그렇게 공원의 주인공 자리 사람들에게 내어주었어요.
푸른 공원에 사람들에게 무대 내어주는 조연으로 만족합니다.
잔디는 신발 발자국에 뜯겨나가도 움켜쥘 욕심이 없습니다.
잔디에 앉아서 푸른 내음 맡고 명상 호흡해 봅니다
명상 속에 흘러들어 가는 잔디의 초록 향기
가슴을 물들입니다
들숨과 날숨에 잔디의 입김 묻어납니다
잔디의 인내심, 잔디의 너그러움 선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곳에 묻혀서 잔디의 꿈꾸게 됩니다
그 꿈은 세상 모든 영양분 끌어안는 땅의 피부가 됩니다
지구촌 모두 잔디의 피부로 물광 내면 좋겠습니다
<호프맨작가의 산문시 '풀잎 잔디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