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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신화, 알베르 카뮈 부조리 vs 니체의 극복

니체의 힘의 의지에 대하여


알베르 카뮈의 삶과 작품은 '부조리'가 키워드다.




그의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겉으로만 읽기에는 부조리로 가득하다.


제우스 신의 형벌을 받아 다시 반복하여 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라가야 하는데 행복하다고 한다.


시지프스는 올라가는 것이 쉬웠을까? 굴러떨어지고 내려가는 것이 쉬웠을까?


당연히 육체적으로는 올라가는 것이 훨씬 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굴러떨어지고 내려가는 것이 순간적인 쾌락이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저 부조리에서 끝내고 손털고 비관적으로 보는 철학이 아니었다.


그가 시지프스를 내세운 것은 '반항'이라는 핵심적인 사유의 키워드에 있다.


인간은 부조리에 삶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인간의 한계에 반항하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 카뮈의 허무주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이방인>에서 허무주의와 부조리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항하라고 하는 메시지를 주었다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그러한 극복의 메시지다. 내밀한 그의 메시지를 깊숙하게 이해 공감하게 되면 결국 카뮈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철학이라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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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사회라는 시스템에 억눌린 우리 삶에 반항할 수 있을까?


숨이 턱턱 막히는 스트레스의 벽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굴복하고 포기하고 멈출 것인가? 결코 그렇게 허무와 부조리에 자신을 버려서는 안된다!



알베르 카뮈보다 반세기 이전의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데 구체적인 제안을 하였다. 특히 <힘에의 의지>에 그가 의지라는 단어를 끌고 온 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니체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힘에의' 의지를 강변하였다. 삶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지다.


살아남기 위해서 반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힘이 요구되는 <힘에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무기력하고 의지력이 없는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것이다. 욕심을 부려라, 그렇게 충고하는 현자들이 있다. 오히려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살아보게 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기존 종교의 창시자들에게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종교에 귀의하고 자신을 버리라고 했다. 니체는 오히려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고 욕망을 갖는 힘에의 의지를 가지라고 하였다. 왜 그렇을까? 이 생애 삶에서 더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더욱 열심히 이 생을 살아내라는 조언이다.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 부조리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의 쳇바퀴 같기도 하다. 하지만 허무주의로 무기력해지고 포기할 것이 아니다. 부조리와 허무를 느꼈다면 시지프스처럼 다시 도전해야만 한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처럼 힘에의 의지로 극복해야만 한다.




시지프스가 다시 한번 바위를 산 정상에 올리는 숙명을 오히려 도전하였고, 내려오면서 조금 쉬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운명을 오히려 극복의 기회로 만들었다. 자라투스트라는 창조한 니체도 엔딩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발의 자라투스트라는 기꺼이 자신의 보금자리 동굴을 박차고 떠날 수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혹은 그의 앞에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불타오르고 씩씩하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의 동굴을 떠났다.


마치 어두컴컴한 산봉우리 뒤에서


솟아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불타오르듯이 씩씩하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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