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말을 끌어안고 울었다
위버 멘쉬(한국의 이전 번역 : 초인)을 외쳤던 니체는 불우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가 고통과 불행한 삶을 딛고서 인류에게 깨달음을 준 문학작품과 같은 아포리즘의 철학 - 생의 철학을 선물하고 죽은 겁니다. 하늘이 아니고 대지를 사랑하라고 수없이 외치면서 니체는 말년에 정신병으로 11년간 죽어갔습니다. 사실 니체는 평생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이겨내고 철학과 문학으로 승화시킨 위인이기에 그의 삶은 위버 멘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독일 최고의 현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인 운명은 낭만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매력으로 철학자, 임상가, 역사가 모두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의 몰락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의 일화들은 니체의 논문들 여러 곳을 찾아서 편집한 것임을 밝힙니다.>
니체는 평소 토리노 거리를 산책하던 중 마차 운전사가 채찍으로 말을 때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연민에 휩싸여 그는 짐승 위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이때부터 니체의 붕괴 시작은 그의 정신 상태를 종식시켰고, 그는 다음 11년을 치료받으며 보냈습니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주 파괴와 몰락의 창조를 언급하였습니다. 과연 11년 동안 그는 철저하게 몰락하였을까요? 그의 삶이 파괴되었을까요? 그 1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정신병원에 있었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급자족하는 여동생의 보살핌 아래 있었나요?
니체는 겨우 명성을 얻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기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는 철학의 전성기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갈망했던 명예를 얻기까지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심지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출판사에서 출판 거부로 자신이 직접 자가 출판하여 지인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지요. 1887년 겨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일 내부나 더 넓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철학을 낯선 사람들에 의해 이상한 모임에서 논의되는 등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명성을 얻게 된 시기, 최고의 전성기에서 무너지다.>
1883~85년에 인쇄된 그의 자라투스트라는 사본이 제한되어 있고 관객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대부분 가까운 친구들이었습니다. 1886년 그의 작품 '선과 악을 넘어서'는 비공개로 출판되었으며 지인들에게 약간의 흥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비평가가 그를 돕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J. V. 위드만과 게오르그 브란데스. 위드만은 잘 알려져 있고 존경받는 스위스 비평가였습니다. 그는 '위험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내며 '선과 악을 넘어서'에 대한 긍정적인 리뷰를 쓴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으로, 니체는 66부를 더 보내 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도 사본을 받았고, 1년 후 <도덕의 계보>도를 받았습니다. 위드만처럼 이 작품들은 그를 엄청나게 흥분시켰습니다. 덴마크의 저명한 비평가인 게오르그 브란데스의 사진. 1904년,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공개 도메인을 통해 덴마크에서 온 저명한 비평가이자 작가였습니다. 게오르그 브란데스는 덴마크의 관심을 통해 덴마크의 선구적인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이미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키에르케고르, 입센의 작품을 칭찬했으며, 이제 그는 니체를 당대의 선도적인 사상가로 칭송했습니다. 그는 1887년 11월 26일 니체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귀족적 급진주의"를 칭찬했습니다. 이 문구와 브란데의 긍정적인 평가는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낸 그를 기쁘게 했습니다.
브란데스는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1888년 4월에 열린 "프리드리히 니체: 귀족적 급진주의에 대한 논의"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니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해명했습니다. 강연은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많은 수용자가 모였습니다. 같은 달에 니체는 토리노에 도착했습니다. 실스-마리아에서 잠시 여름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기간 동안 신문 가게 위에 피아노가 있는 아늑한 방인 비아 카를로 광장의 № 6번지에서 토리노에 머물렀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활력을 얻어 최고의 작품인 우상의 황혼, 에체 호모, 니체 콘트라 바그너를 제작하는 생산적인 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쓴 것은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문이 새겨진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가 그려진 명판입니다. 이 명판은 토리노에 있는 니체의 숙소 밖에 놓여 있었습니다. 명판은 토리노에 있는 니체의 주소지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집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미지의 것을 유혹하는 영혼의 충만함을 알고 있었고, 영웅을 이끄는 힘의 의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높은 운명과 천재성을 증명하는 책인 "에체 호모"를 썼습니다. 1888년 봄/가을을 기념하기 위해 토리노 시는 [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889년 1월 3일 아침, 니체는 마차 운전사가 채찍으로 말을 격렬하게 때리는 것을 목격하고 평소처럼 카를로 앨버타 광장을 산책했습니다. 안타까움에 그는 짐승에게 달려가 팔을 목에 두르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현장에는 소수의 관객이 모였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다행히 집주인인 피노가 현장에 도착해 그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나빠졌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폐 꼭대기에서 격렬하게 비명을 지르고, 피아노로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일관성 없이 옹알이를 떨었습니다. 아무도 감히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편지도 "신은 지상에 있다"라는 이상한 발언과 기괴한 발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메타 폰 살리스-마르슐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합니다. "하늘이 어떻게 기뻐하고 있는지 모르시나요? 저는 방금 왕국을 점령했습니다. 교황을 감옥에 던져 빌헬름, 비스마르크, 스토커에게 총을 쐈어요." 편지는 "십자가"라는 서명으로 끝납니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와 비슷한 편지가 보내졌습니다; 교황, 이탈리아의 황제 움베르토에게 보낸 것과 유사한 편지들입니다.
니체의 친구 오버벡은 소파 가장자리에 웅크린 친구가 니체 콘트라 바그너를 위한 원고를 눈 한 치 앞에 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너무 비극적이어서 오버벡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절할 뻔했습니다. 문간에 있는 친구를 본 니체는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오버벡을 포옹한 후 소파 구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심각한 망상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새로운 디오니소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투덜거림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드물게는 그의 업적과 미래의 명성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버벡은 바젤에 있는 윌레 박사에게 미친 편지를 보냈고, 윌레 박사는 니체를 즉시 정신과 클리닉으로 보내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치과의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니체를 토리노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니체를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오버벡과 피노, 치과의사는 철학자와 함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왕족처럼 대하며 왕실의 환영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피노의 잠옷을 왕관으로 쓴 니체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바젤에서 니체는 8일 동안 빌 박사의 보살핌을 받은 후 예나로 떠났습니다. 니체는 수년 전 빌 박사를 만났고, 실제로 1875년 종교 광신도였던 아돌프 비셔와 관련된 대화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비셔는 니체에게 독일 정신과 의사 오토 빈스왕거의 보살핌 아래 정신 이상자 치료 및 치료를 위한 예나 클리닉으로 아들을 옮기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그의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몸은 근육질이고 건강하며 떨림이나 언어 장애는 없었지만 대화는 혼란스럽고 망상적이었습니다. 미친 춤은 계속되었고, 그는 이른 아침에 광인들의 방문을 받았다고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매우 행복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실내 행동은 보컬(노래하고, 비명을 지르고, 시를 낭송하는)이었고, 실외 행동은 신체적(옷을 벗고 바닥에 누워)이었습니다.
빌 박사는 니체가 말기 매독의 산물인 프로그레시브 마비를 앓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빈스왕거 니체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바젤에 도착하여 빌 박사에게 아들을 정신 이상자 치료 및 치료를 위한 예나 클리닉으로 이송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독일 정신과 의사 오토 빈스왕거의 흑백 사진. 그는 안경을 쓰고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오토 빈스왕거는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불치병 3차 진단을 받고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는 과대망상에 시달렸고, 밤 깊은 곳까지 소총이 자신을 겨누고 남자들이 그를 고문하는 환각을 겪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대변을 바르고 안경에 소변을 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클리닉의 익명의 환자는 니체를 본 경험을 그렇게 회상했습니다. 너무도 불우했던 그의 말년을 사람들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가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호프맨작가는 인문학적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중에 한 명 큰 영감을 주고 이 소설을 적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글들은 저의 가슴에 살아있는 문장들이 되어 글을 쓰게 만듭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백발의 자라투스트라는 엔딩 장면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이 작품의 엔딩 장면에서도 그려내었습니다.
그 자신이 불행하게 죽어갔지만, 이 또한 그에게 영원회귀로 받아드렸을까요? 그러한 의문점이 저의 소설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예술가로서 빈센트 반 고흐의 불행했던 삶과 너무도 많이 닮은 프리드리히 니체는 철학가로서 문학가로서 우리들의 삶에 영감을 준답니다. 위대한 위인들의 삶이 감동인 것은 그들의 신념과 성취를 위해서 모든 것을 고통과 불행을 이겨내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극복하였던 겁니다. 그가 위대한 작품들을 탈고하고 유고도 남기면서 현대의 우리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그 시대는 너무 앞서갔던 철학적 메시지들이었습니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니체의 철학 - 삶의 철학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이 시대 2025년을 예견하였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