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맨작가 창작동화소설이 탄생하다
"클래식 음악이 사양산업이 된 것은 전기로 소리를 증폭하는 앰프 때문이다.
아이폰이 삼성 스마트폰을 이기는 것은 문화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재현하는 회화는 설자리가 없었다.
인상주의의 등장이 출발점이었다.
마우스의 등장, 그것을 손 터치로 바꾼 애플, 스티브 잡스는
편집의 천재였다.
창조라는 것도 편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 동감한다.
창조라는 것이 인류를 광풍처럼 휩쓸게 된 것은 불과 100년이다. "
*깊은 통찰을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김정운 교수의 <창조의 시선>에서 읽은 공감되는 글들, 사례들이 늘
가슴에 담긴다. 어젯밤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잠든 이 책의 내용들이 4시 새벽 기상의 시간에도 기억되었다.
창조라는 과정이 글을 쓰는 창작가에게는 숙명 같은 것이다.
내게 창조는 발상의 전환, 생각의 전환이다. 그전에 생각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나에게 관찰의 시선이 곧 창작의 시선이 된다. 천체와 같은 거대한 관찰은 지상에서 만나기 어렵다.
과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물학자도 아니지만 작은 세상에서 큰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일상이 위대한 것은 흘러가는 일상에 빛나는 창조의 순간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하는 새벽 기상과 글쓰기, 공부들이 일상의 루틴이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글감으로 삼아 글쓰기를 하게 된다.
가령 붉게 번지는 해돋이의 하늘을 새벽에 만나지만,
그 날 새벽은 흐린 날씨로 인하여 해돋이가 보이지 않게 된 새벽하늘이었다.
전날 밤에 하늘을 쪼개는 폭풍우가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은 새벽이었기 때문이었다.
빗줄기가 가라앉았다. 그 사이 새벽은 다시 생명들이 움터오르는 시공간이 된다.
폭풍의 언덕 뒤 오히려 흙냄새와 식물들의 소리에서 창조적인 삶의 현장들을 만나게 된다.
새벽 5시경 그곳에서 물기 어린 계단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달팽이를 보았다.
거창한 해돋이의 관찰은 어쩌면 식상하다. 해돋이의 글도 자주 보면 식상할 수 있다.
느림보 달팽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시선에서 많은 것을 창조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이었다.
아기 달팽이 덕분에 느리게 관찰하는 것을 배우게 된 체험이 소중하였다.
이 달팽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온통 정신이 팔려서 그 움직임을 관찰하게 된다.
두 개의 안테나를 하늘로 뻗으면서 두개의 앞발과 빨판 같은 몸을 펼치고 전진하였다.
이 달팽이의 두껍고 무겁게 보이는 달팽이집은 어깨 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 안에 숨어있지 않고 전진하려는 달팽이는 흙바닥으로 가려는 몸부림이었다.
가장 감동이 뭉클하게 밀려오던 순간은 달팽이가 높은 계단에서 흙바닥으로 가려고 몸을 비틀면서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그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슬로비디오인지 참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벽 5시 반 아침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그 자리의 달팽이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궁금하여 그 달팽이의 길을 추적해 보니 찾았다. 달팽이는 무사히 숲 사이 흙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새벽이슬이 묻어서 습한 것이 그에게 너무도 행복한 삶의 터전이었다.
이 새벽의 발견이 무한한 창조력을 일으켰다.
그날 하루 <달팽이의 꿈>이라는 동화 소설을 창작하게 되었다.
'달팽이가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집으로 향하는 소소한 감동의 스토리"이다.
우리네 사람들도 일상의 습관이 얼마나 고역인지 깨닫게 된다.
달팽이의 집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지만 꾸역꾸역 일터로 간다.
창조가 거대한 UFO쯤 되는 것도 아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창조력을 이어질 수 있다.
창조력은 그 작은 순간을 몰입하고 통찰하여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퀀텀점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달팽이의 꿈>이 나의 꿈이 되는 그런 새벽에 감사할 따름이다.
창작 소설의 모티브를 얻게 된 달팽이의 느림보 몸부림이 하루 종일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 달팽이가 동화 소설 한편을 완성하게 하였으니, 나에게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