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격돌
사람과 악마, 이 둘의 격돌을 낭만적으로 그린 파우스트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마르가르텔을 사랑하는 파우스트가 그것이다.
그녀는 메피스토펠레스를 기품 있는 낭만주의자로 보았다.
"당신의 한마디가 이 세상의 모든 지혜보다 즐겁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마르가르테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다.
평생 일을 한 그녀의 손은 거칠다고 부끄러워한다.
악마 메피스토의 속마음은 그녀를 시험하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꽃잎을 하나씩 따면서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않을까?
이렇게 사랑을 확인하려는 순수한 낭만주의자로 그려진다.
어쩌면 유치하게 보이는 이 꽃잎 따는 점치는 놀이가 한국의 전래 놀이가 아닌가!
우리 젊은 날 꽃잎 따기가 서양에서 최초로(?) 문학작품에 그려진 것도 파우스트라는 것에 경이롭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꽃잎을 따면서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미래를 점쳐본 적이 생각난다.
한 사람에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가 공존한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계약은 꼭 자신 안에서 갈등하는 양면성과도 같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들을 품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시험하기도 한다.
지식을 탐구하고 꿈을 정복하려고 파우스트처럼 노력하지만,
동시에 과연 그렇게 노력하는 것에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의심을 하게도 된다.
나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한 사람이 꼭 한결같이 하나의 자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를 이원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명명해도 좋다. 적어도 나의 세계는 두개로 존재한다.
하나, 쉬고 싶은 나 vs 일하고 싶은 나
정말 원 없이 놀고 싶다. 출근 스트레스 없이 쉬고 싶다. 실컷 잠을 즐기고 싶다.
직장인으로 직장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만큼 쉬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일하고 싶은 나가 존재한다. 남들이 일터로 갈 때, 나 또한 나를 필요로 하는 일터로 갈 수 있다면
사회인으로서의 존재감이 생기는 것이다. 남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 가정의 살림에 공헌하는 역할을 할 때, 나 홀로 쉬려고 한다면, 쉬는 것이 오래 지속된다면 존재감의 회의에 들게 돼버린다.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일하는 나와 쉬고 싶은 나를 공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게으르지도 않으면서 나의 놀이터를 가꾸어나가는 삶, 워라벨이라고 하잖은가!
대학자로서 인류의 지성을 탐닉한 파우스트는 그의 전 생애 일에 묻혀 살았다.
하지만 그의 욕망에서는 그의 영혼마저 팔고 계약하면서 젊어져서 놀고 싶은 나에 사로잡혔다.
그가 깨닫게 되는 엔딩에서 우리는 답을 찾게 된다.
둘, 사랑하고 싶은 나 vs 사랑받고 싶은 나
파우스트는 젊어져서 사랑하고 싶은 여자와 대단한 연애를 벌인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메피스토가 그들을 시험한다.
우리 모두 사랑받고 싶다. 사랑을 주어야 하는 이타적인 마음으로만 살 수가 없다.
솔직하게 보통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사랑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꿈같은 바람이고 자신을 다스리는 구호일 뿐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누구도 자신보다 우선하여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러한 지점을 메피스토는 잘 알고 있었다.
신에게 파우스트의 인간성을 시험할 것으로 공식적으로 승인받는다.
사랑으로 파멸할 수도 있음을 메피스토를 알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가득 찬 것을 메피스토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숙해진다.
젊은 시절의 사랑과, 중년 이후의 사랑은 성숙도에서 다르다.
셋, 지적이고 싶은 나 vs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
지적이고 싶은 나가 공부를 한다. 지적인 추구는 언제나 달콤하지는 않다. 쓴맛도 보아야 단맛을 찾게 되는 과정이 지적인 여행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빼앗긴다.
파우스트는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름다운 것에 빼앗겼다.
젊음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세대다. 파우스트가 젊음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빠져들었다. 아름다움은 양면성이 있다. 쉽게 빠져들 수 있지만 쉽게 식을 수도 있다.
파우스트가 깨달은 것에 답이 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은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중에서
쉽게 찾거나 가지게 된 아름다움을 얻는 자는 그것을 오래도록 소유할 자격이 없다.
지적인 생명의 것, 자유로운 해방의 영혼은 오랜 시간 노력하여야만 가질 수 있다.
어렵게 얻은 것의 가치는 비로소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악마적인 메피스토는 사람들이 쉽게 얻는 쾌락에 지혜를 저버리고 영원한 가치를 잊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악마는 언제나 사람들의 쾌락을 시험한다. 악마의 시험에서 지고 싶지 않다.
우리들은 때때로 시험에서 질 수도 있다. 특히 젊어서는 그럴 수도 있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그런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는 나는 날마다 싸워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지혜를 찾고 싶다. 나약해서 지는 패배율이 줄어들고 슬기롭게 이기는 승률이 높아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중년이 되어서 더욱 메피스토에게 지고 싶지 않다. 나는 싸워서 이기고 싶다. 많이 깨닫고 더욱 지혜로워지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두 개의 자아와 양립하고 대립할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지혜를 가지면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사랑도 영원한 것이면 좋겠다.
인류의 보편적인 지혜를 위해서 싸우고 싶다. 아직도 날마다 싸우지만 지혜롭게 파우스트의 편에 선 자로 늙어가고 이겨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