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볼펜 한 자루를 다 써본 적 있나요?”
요즘처럼 디지털 기기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볼펜을 끝까지 다 써본 경험은 의외로 흔치 않죠. 스마트폰 메모장에 몇 자 적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익숙해진 요즘. 손으로 무언가를 적는다는 게 점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모나미 볼펜을 꺼냈어요. 그 검정과 흰색 몸체에 심플한 디자인. 손에 쥐는 순간, 갑자기 시간 여행이라도 간 듯이 예전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하루에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다 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엎드려서 졸다가 다시 일어나 책을 읽고, 단어를 쓰고, 또 쓰고. 잠도 하루 한 시간쯤 겨우 눈을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로 몸을 혹사시켰지만 그땐 그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방식이었어요. 그때 저는 정말 하루하루를 쥐어짜듯 살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공부보다도 그 치열하게 살아낸 하루하루가 저를 더 성장시켰던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쉬는 것도 중요하다”, “너무 치열하게만 살면 안 된다”라고 하잖아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쉬는 시간”과 “늘어져 있는 시간”은 다릅니다.
진짜 휴식은 치열함 이후에 와야 그 가치가 생겨요. 아무것도 안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건 어느새 ‘휴식’이 아니라 ‘무력감’이 되더라고요.
일찍 잠이 든 어느 날 새벽 2시쯤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푹 잤으니 몸 컨디션도 괜찮았죠.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에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왔고 책을 펼치고, 오랜만에 꺼낸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줄을 긋는 촉감, 단어를 쓰며 떠오르는 생각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는데 정말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머리는 맑아지고 마음은 정돈되고. 문득 예전에 쓰던 영어 단어장까지 꺼내서 복습도 해보고 한참 전에 읽은 책도 다시 펼쳐보게 되더군요. 그렇게 다시 치열한 나로 돌아갔던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 졌어요.
“치열함의 쾌감.”
이 감정, 진짜 짜릿합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낸 후에 느껴지는 그 조용한 성취감. 결과와 상관없이 “오늘 참 잘 살았다”는 감정.
이게 바로 우리가 자꾸 목표를 세우고, 일에 몰두하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요즘 많은 분들이 SNS나 유튜브에서 말하죠. “자기 계발 강박증에 시달리지 말자”, “치열함보다는 균형이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그 말이 너무 강조되다 보면 어쩌면 우리는 치열함 자체를 피곤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치열함이라는 건 반드시 나를 지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적당한 치열함은 나를 가장 살아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치열함 뒤에 오는 고요한 기쁨, 이게 진짜 쾌감입니다.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다 닳았을 때 느끼는 그 기분, 눈에 보이게 줄어든 잉크, 손에 묻은 흔적, 다 쓴 필기구의 무게감. 그건 단순한 문구류가 아니라 내가 쏟아낸 시간의 증거였던 거예요.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모나미 볼펜 하나 다 쓴 게 뭐 그렇게 대단하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해 보세요. 요즘은 메모장도, 스케줄러도, 독서노트도 전부 앱으로 대체됩니다. 그러니 더더욱 손으로 쓴 글 한 줄, 직접 쥐고 써 내려간 흔적이 귀한 시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치열하게 살아라”, “새벽 2시에 일어나라” 이런 조언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여러분 안에도 분명 치열한 자신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게으른 시간도 분명 필요합니다. 저도 하루 종일 핸드폰 붙잡고 널브러져 있던 날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시간이 자꾸 길어지면 그건 휴식이 아니라 현실 도피가 됩니다. 반대로 치열한 하루를 보낸 후의 10분 휴식은 진짜 꿀맛 같죠. 그 기분, 아마 누구나 공감하실 거예요.
오늘도 괜찮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돼요.
다시 모나미 볼펜 하나 꺼내서 단어 한 줄 써보세요. 오늘 하루를 기록해 보세요.
그렇게 작게 시작하는 치열함이 결국은 당신을 더 살아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리고 어느 날, 그 볼펜 잉크가 다 닳아 있는 걸 보며 생각하게 될 거예요.
“아, 나 참 잘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