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커피가 식어갈 때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읽는데 정작 내 문장은 남아 있지 않을까?
책은 줄을 긋고, 영상은 저장해 두고, 좋은 문장은 메모장에 복사해 두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문장들은 내 삶에서 힘을 잃어버립니다. 분명 감동했는데 남는 건 없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좋은 말은 많이 아는데 내 것이 되지는 않는 느낌.” 그 답을 저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다시 발견했습니다. 바로 손글씨였습니다.
요즘은 뭐든 빠르게 처리하는 게 미덕인 시대입니다. 메모도 타이핑, 생각 정리도 메모 앱, 감정도 이모지로 표현합니다. 그래서인지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행위는 어쩐지 비효율적으로 느껴집니다. 굳이 펜을 잡고 종이를 꺼내는 시간이 아까웠고, 노트북으로 정리하면 더 깔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마음에 꽂힌 문장 하나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노트에 적어봤더니 뜻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그 문장이 제 기억과 경험, 감정과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들이 그다음 줄에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글은 잘 쓰는 사람이 쓰며 창의력은 타고나는 거라고 오해하지만 손으로 써보면 알게 됩니다. 손글씨는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꺼내는 통로에 가깝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뱅뱅 돌던 생각이 손끝으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모양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타이핑할 때는 문장이 먼저 나오고 생각이 따라오지만 손글씨를 쓸 때는 생각이 먼저 나오고 문장이 따라옵니다. 그 미묘한 차이가 글의 온도를 바꿉니다.
저는 요즘 감동받은 문장이 있으면 꼭 한 번은 손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문장은 더 이상 남의 말이 아닙니다. 제 언어가 됩니다. 제 하루의 태도가 되고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책을 읽다가 마음이 멈추는 문장을 만나면 바로 노트를 펼칩니다. 손글씨로 쓰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는 그 문장과 함께 살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게 아마 ‘내 것으로 만든다’는 감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알면 됐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문장은 쉽게 사라지지만 손으로 새긴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이건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 배움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손글씨는 느립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그 느림 속에서 문장은 침전되고 생각은 가라앉고 감정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혹시 요즘 읽은 문장 중에 유독 마음에 남는 말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만 꺼내보세요. 잘 쓰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쁘게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천천히 한 글자씩 적어보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 옆에 나의 문장이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남의 문장을 빌려, 조금씩 나의 삶을 써 내려가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읽은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손으로 써보는 것이라는 걸요. 오늘도 노트 한 페이지가 조용히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페이지만큼 제 하루도 조금은 단단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