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내가 아닌 것들을 경험하는 시간 또한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방 정리를 하다가 옷장 구석에서 낯이 익은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보니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노트와 일기장이 보물처럼 담겨있었다. 마치 오늘을 위해 고이고이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그중에서 나는 일기장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몇 장을 훑어보는데, 놀랍게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날짜를 보니 무려 6년 전에 쓴 일기였다.
한 페이지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한 6년 전 어느 날의 일기에는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데 우선은 안정적인 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현실적인 고민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몇 권의 노트에 그날그날의 상념을 적으며 작가로서의 꿈을 삭혀왔었나 보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사실 나는 6년 전에도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걸. 우연히 발견하게 된 6년 전 일기장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준비에 지쳐 서러운 눈물을 쏟던 소녀가 사실은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조심스러운 고백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소녀는 그게 진짜 자신의 꿈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찾은 꿈을 뒤로한 채 또 다른 방황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방황, 또 다른 방황, 끝나지 않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끝없이 방황 중인 스스로가 참 많이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만약 지난 6년간 방황의 여정의 없었다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내 방향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지난 6년의 시간은 멈춤과 뒤쳐짐의 시간이 아닌, 내 방향에 대한 확신을 위해, 마음이 성장하는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소중한 걸 알아보기 위해, 내게 그동안의 방황이 필요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걸 찾기 위해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할 테니까.
자기 방향을 확신하기 위해선 때론 방황이 꼭 필요하단 걸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꿈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확신하는 건 더 중요한 거구나. 내가 확신과 용기가 생길 때까지 꿈이 나를 기다려 준 거구나.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백하자면 언제나 나는 지름길을 찾아 헤맸었다. 진짜 내 길을 찾아 하루빨리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빨리 내 길을 찾았다고 한들 과연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 길이 과연 내 길이 맞는지 고민만 잔뜩 하다가 더 오랫동안 멈춰서 있진 않았을까.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방황 끝에 돌아온 만큼 이 길이 내 길이고, 내 방향이라는 확신이 점차 커졌다. 그러니 내겐 돌아가는 길이 결국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돌아간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길이 전부 내 인생길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나는 그 길을 거쳐야만 했구나. 방황 속에서 나만 멈춰있고 뒤쳐지는 듯 보였는데, 내 방향으로 일치되기 위한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었음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방황의 시기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를 알아가는 필수적인 시간이며, 방황 역시도 내 속도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건 이런 소중한 방황의 경험들을 좀 더 빨리 해 볼 수는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나는 지난날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텐데. 어떤 특별한 경험도 없이 그저 시키는 공부만 해야 했던 십 대 시절이 안타까움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십 대의 난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이걸 해보고 싶다, 저걸 해보고 싶다, 이야기를 하면 그때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걸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거나, 혹은 나중에, 적당한 때가 되면, 그때 하라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학생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얘기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지만 그때 어른들이 말했던 적당한 때라는 건 절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해도 될지 말지에 대한 적당한 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오직 나만이, 내 가슴만이 알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나는 내 가슴에게 물었다. 지금은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꿈꿔왔던 일에 도전하기에 적당한 때일까? 어쩌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가슴은 이내 답을 들려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걸.’
사실 6년 전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시작해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때 나는 실패도, 방황도, 제대로 된 경험을 해보지 못한 탓에 그때가 사실은 꿈을 따라나서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그런데 왜인지 지금은 두려움보다 두근거림이 내 가슴을 자꾸만 두드려 대고 있었다. 지금이 네가 꿈꾸던 바로 그 때라고. 이토록 내 마음이 두근거릴 때, 용기를 내보고 싶은 설렘이 충만한 지금이, 언제나 가장 적당한 때인 거라고.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지금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지금의 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잃을 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잃을 게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이미 무언가를 산더미처럼 이루어 났다면, 그걸 다 포기하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내 길이 아니걸 알고 끙끙대면서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룬 게 없는 지금이 내 꿈을 찾아 나설 절호의 기회였다.
가슴을 들여다볼수록 생각이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지금 너무 늦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아닐까?’하는 걱정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대신 용기 내서 한 번 부딪혀보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오직 지금만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제껏 지금은 꿈을 따르기엔 때가 아니라고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바로 지금이 최선의 시기라는 확신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고민만 하다가 내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정말로 늦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내 가슴이 두근거릴 때, 그때가 바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적당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며칠 전 그 꿈을 꾼 이유는 온전히 내 삶을 살고 싶은 내 간절함이 만들어낸 나 스스로가 내게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숱한 방황을 이겨내고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내게 용기를 잃지 말고 가슴이 이끄는 방향대로 나의 길을 가라고. 나의 모든 시간들이 모여 반짝반짝 빛나는 내 길이 될 거라고.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해도 괜찮겠다는 작은 용기가 샘솟았다. 물론 가슴 한편에 이번에도 또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게 사실은 너무너무 두렵다. 또다시 실패하고 좌절할까 봐. 다시 일어서지 못할까 봐.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나를 비추는 내 길이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 두렵지만 희망이 생겼다. 게다가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 안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미처 꺼내보지도 못했다는 자괴감, 온전히 나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절망감일 테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게 내면의 목소리가 또 말을 걸었다.
‘일단은 시작해보자. 해봐야 아는 거잖아. 내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 내 방향이 아니면 어쩌나 걱정만 하느라 시도조차 해보지 않으면 영영 내 길이었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미련만 잔뜩 남게 될 거야.
혹시 실패하면 어쩌지? 이러다가 점점 더 뒤처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늘 걱정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람에 정말로 뒤처지게 될 걸. 그게 바로 진짜 실패가 아닐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적당히 고민하고, 과감히 시작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야. 내 가슴이 글을 쓰고 싶다고 외치고 있잖아. 내 방향을 찾는 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딨겠어. 그냥 시작해보는 거야. 열정이 생겼을 때, 지금 당장. 이제 용기 내서 글을 써보는 거야.’
더 이상 웅크리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두렵더라도 뭔가를 다시 시작해 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게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일단 용기 내서 시작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하지 않으면 그 어떤 가능성도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거창하게 용기 낼 것도 없이 그냥 내 방향으로 한 발을 디뎌보기만 하더라도 충분할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더 이상 걱정만 하며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조금 더 빨리 시작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되기 전에, 시작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그래, 얼마가 걸려도 괜찮아 그냥 한 번 가보는 거야.
한 발 한 발. 뚜벅뚜벅.
일단 한 발을 내딛는 게 중요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