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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3. 늦지 않았어, 방향이 다를 뿐이야

꿈에 나타난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생생해서 꿈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나는 별들이 가득한 우주가 아닌 내 방 책상 위에 침을 잔뜩 흘린 채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묘한 기시감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베고 있던 노트는 펼쳐진 채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컴퓨터는 어느새 절전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까만 유리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아서일까, 이상하게 기분이 묘하면서도 편안했다. 참 오랜만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안정감이었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걸까. 처음엔 그 꿈의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꿈속의 이미지들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었는지 분명해졌다.  


내가 무한히 달려야만 했던 1차원 직선 세계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인생을 살아온 방식과 같았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고,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그 정답을 이루려고 하며, 그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유일한 성공방식인 곳. 나는 내가 사는 현실이 꿈속의 직선 세계와 같다고 믿고 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서기 위해,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데도 무한 경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꾸만 조급했던 이유, 내 길을 걸으려 할수록 더 뒤처진다 느꼈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직선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성공을 향해 경쟁하듯 달려가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나만 늦었다는 초조함에 두려웠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완전히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직선을 가장한 암흑의 원형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길 중 하나였을 뿐, 그것이 실제 세상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의 맹목적인 믿음이 만들어낸 개미지옥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원치 않지만 무작정 잘못된 길을 계속 따라가고 있는.


대신 직선 세계에서 튕겨져 나간 뒤 허공에서 본 그 수많은 형형색색의 길들, 누구나 자기만의 길 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가는 것, 그게 내가 사는 세계의 진짜 모습이었다. 다만 나는, 아마도 우리는, 직선 세계의 늪에 빠져 우리 앞에 펼쳐진 진짜 길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찬란히 빛나는 그 수많은 각자의 길들을.  






그제야 생각의 시선을 돌려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자기만의 길을 걸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오로지 자신의 길을 믿고 나아가는 그들은 그저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충분히 빛나고 멋져 보였다. 그들의 나이가 몇이고 얼마나 빨리 자기 길을 찾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만의 길을 걷는 데 늦고 빠름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길이 있고, 그 길의 방향이 모두 다르다면, 애초에 늦고 빠름을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각자가 향하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속도를 비교한단 말인가. 자기만의 길을 걷는 사람들 간에 속도를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위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만 늦었다고, 뒤쳐졌다고, 낙심하곤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위로 가는 건 내 길의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사실 내 길은 왼쪽, 어쩌면 아래쪽으로 향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나는 내 길로 나아가면 갈수록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며 뒤쳐졌다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들이 어디론가 나아갈수록 나는 멈춰 있고 뒤쳐지는 듯 보였으나 시선을 그저 나에게로, 내 길로 돌리기만 하면 나 역시도 내 길 위에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중이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만 한참 뒤처졌다고, 나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온전히 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지 방향이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내 삶과 길의 방향이 다른 이들과 좀 많이 다른 것뿐이었다.  


내가 1차원의 직선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 이상, 나와 동일한 방향의 길을 걷는 사람이 없는 이상, 내 삶의 늦고 빠름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었다. 나는 늦은 것도, 뒤쳐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길 위에서, 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늦은 게 아니라 방향이 다를 뿐이었다.






사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늦었다는 생각, 나만 뒤쳐지고 있다는 초조함이 끊이질 않았다. 늘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뒤처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 일쑤였다.  


나는 늘 늦었다고, 뒤쳐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작도 늦었고, 과정도 늦었고, 나는 왜 이렇게 뒤처져만 가는지, 다들 빨리빨리 잘도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왜 이리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무척이나 실망스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조금도 늦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고, 그게 다였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그냥 나였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와 내 속도를 비교할 수도,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대기업에 다니고 전문직으로 승승장구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하곤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과 내 삶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으니 누구와 비교될 수 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그토록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낮추곤 했을까.  


비교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제야 보였다. 내가 늦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동안의 내 걱정이 꽤나 바보 같았구나, 싶었다. ‘나는 이미 늦었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미리 겁을 먹고 있었다니. 사실은 각자의 길, 각자의 방향이 저마다 다른 것뿐이었는데.


나는 왜 새로운 시작을 해보기도 전에 나이 서른에 작가에 도전하는 건 늦었다고 결론 내렸던 걸까. 단지 주변 사람들이 앞서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나만 더 뒤처질까 봐 불안하다는 핑계로. 그건 마치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당신들 인생에 기준을 두고 살아요. 그래서 나는 전혀 늦은 게 아님에도 이미 늦었다고 믿어요.’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일인데.  


지금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이유로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 포기해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 기억나지도 않는다. 조금이라도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까 봐, 말도 안 되는 두려움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서 늘 안전한 길, 적당한 성공이 보장되는 길만을 따라왔던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리석은 겁쟁이로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것 같아 보여도 그건 그냥 착시효과일 뿐이니까. 나와 길도 방향도 다르다면 속도를 비교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의 삶을 보며 그들의 빠른 성공에 부러워하거나 괜한 자격지심에 의기소침할 필요조차 없다. 늦었다는 생각에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제 그만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속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길을, 나만의 방향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조은지, 넌 늦지 않았어. 방향이 다를 뿐이야. 네 길을 믿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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