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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4. 지난 방황의 이유

며칠 전 그 꿈은 잊을만하면 떠올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사람들을 볼 때면 길을 하나씩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마지막 조각을 맞추지 못한 퍼즐처럼 어딘가 구멍이 뚫린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빠진 퍼즐 조각을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언제나 실패였다. 꿈속에서 나는 희미한 별을 만났고, 그 별은 내 손이 닿자마자 길이 되어 내 앞뒤로 뻗어나갔다는 것. 그리고 순간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에 뒤를 돌아보다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꿈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창문을 뚫고 쏟아지는 엄청난 햇살에 불현듯 기억에 없던 마지막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마치 그때 그 꿈속의 세계로 다시 와 있는 듯이.  


가장 먼저 별에서 길이 뻗어 나온 후 등 뒤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빛에 뒤를 돌아봤을 때,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났다. 그 엄청나게 눈부신 빛은 길 위에 놓인 수많은 ‘나’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등 뒤에 펼쳐진 구불구불한 길은 내가 지나온 과거였다. 그런데 그 길 위에 수많은 ‘내’가 보였다. 모두 다 내가 겪은 과거의 내 모습들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지난날의 모든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길 위에 있었다. 상처 받고, 실패하고, 대부분 잊고 싶은 기억 속의 내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과거의 내가 모두 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내 방황이, 내 실패가, 헤매고 엎어졌던 지난 시간이, 모두 다 눈부시게 빛난 나의 삶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지난번 꿈을 꾸다 깨어났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바로 이 빛 때문이었다는 걸. 눈부시게 빛났던 내 지나간 모습들을 보며 그만 눈물이 났기 때문이었다는 걸. 


꿈속에서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실패라고만 여겼던 지난 시간들이 모두 다 빛나는 내 삶의 조각들이었다는 걸. 그 실패로 보인 조각들이 나라는 퍼즐을 온전하고 빛나게 완성시켜 주고 있다는 걸. 내 두 눈에서 또다시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비로소 지난날의 방황이, 내 방황과 실패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아오고 있었을 뿐이며, 그동안의 실패와 방황은 내 삶의 방향을 찾아 나아가는 소중한 여정의 일부였다. 멈춰있고 뒤처지는 듯 보여도 내 방향으로 일치되기 위한, 무척이나 중요한 시간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의 방황을 내 인생의 오점으로만 여겨 왔었다. 자격증 준비며, 취업, 창업 등 참 다양하고 많은 일을 했었지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채 일 년을 지속하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전망이 좋아서, 재밌을 것 같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시작한 일들은 결국 또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보며 자기 길 하나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떠돌이, 정답이 뻔히 길도 따르지 못하는 루저라고 자책하곤 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보았던 방황하던 시절의 내 모습들이 앞으로 펼쳐질 날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간의 방황이 대견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대학에 입학해서 스물아홉에 글을 쓰며 살기로 결심하기까지 대략 십 년에 가까운 방황 기를 거친 셈인데,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주저앉아 정지해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심지어 뒤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내 방향을 찾아, 내 길 위에서 나름대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하나의 길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도 헤매는 바람에 구불구불하고 꼬여 있긴 했지만 모두 하나의 길로 연결된 내 길이었다. 지우고 싶던 방황마저도 모두 다 나의 길이었던 셈이다. 헤매던 지난 모든 시간들이 모여 찬란히 빛나는 내 길이 된 것이다.  


‘그래, 맞아. 진짜 내 방향을 찾기 위해 방황이 필요했었던 거야..!’ 


내 방황은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을 벗어나 나만의 방향을 찾기 위한 소중한 여정이었던 게 아닐까. 그토록 지난한 방황의 시기를 겪었기에 나는 진정한 내 방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방황은 수많은 실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실패들 말이다. 사실은 이번에도 나는 또 실패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에 선뜻 꿈의 방향으로 걸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길을 잘못 들어서 나만 더 뒤처지는 거 아닐까? 재능이 없으면 어쩌지? 또 실패하는 거 아닐까? 이번에도 잘못될까 두려워.’ 


또다시 내 안의 두려움이 속삭였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다독였다. 


‘아니야. 이젠 알잖아. 방황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는 걸. 길을 잘못 든 것처럼 보였던 방황의 시기마저 모두 다 내 여정의 일부였잖아. 만약 이 또한 실패로, 방황으로 끝이 나더라도 나에게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줄 거야.’  


맞아. 모두 다 내 여정이 될 테지. 틀렸다고만 여겼던 내 방황했던 과거가 나만의 방향을 찾아온 소중하고 빛나는 과정이었음을 알고 나니 지금 글을 쓰는 것 또한 또 다른 방황의 과거가 될지언정 그마저도 내 여정의 빛나는 일부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 분명해졌다. 나는 그동안 또다시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어딘가에 가두고 있었다. 그저 실패가 두렵다는 이유로, 더 이상 방황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내 앞에 벽을 쌓고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내가 쌓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엄청나게 거대한 벽을. 이제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동안 높고 단단하게 쌓아왔던 내 앞의 유리벽을 깨부술 때였다.  


사실 내가 유리벽을 쌓았던 이유는 아직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는데 또다시 실패할까 봐 낯선 길,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막았던 게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직 나는 청춘(靑春),  말 그대로 인생의 푸른 봄을 지나고 있었다. 봄이란 무릇 뿌리를 깊게 내리고 싹을 틔우는 시기가 아닌가. 이룬 게 없는 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몰랐다. 난 왜 무작정 봄에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봄을 충실히 보내면 자연스레 열매를 맺게 될 텐데.  


지금은 깊고 넓게 뿌리를 뻗을 때였고, 줄기를 더 튼튼히 하고 잎을 키워나갈 때였다. 그리고 내 인생을 어떤 꽃과 나무로 키워갈지 신중히 알아나갈 때였다. 나를 성장시킬 태양이 어느 방향에 떠 있는지 그걸 알아나갈 때였다.  






일요일 이른 새벽, 왠지 걷고 싶어 졌다. 내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집을 나선 후 나무들로 하늘이 가려진 산책로를 따라 걷고 걷다 보니 눈앞에 탁 트인 한강이 펼쳐져 있었다.  


순간 한강이 내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강물에 반짝거리는 햇빛을 보라고, 강물에 비친 햇살이 꼭 내 인생을 응원해주는 것만 같았다. 네 인생도 이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내 속도로 걷고 있는 내가 눈부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제 걱정은 내려놓고 온전히 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따스한 손길로 내 등을 떠밀어 주는 것만 같았다.  


내 삶을 응원받는 따스함 때문이었을까. 계단에 걸터앉아 수면 위에 반짝거리는 빛 알갱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 인생의 오점이라 여겨 이제껏 꽁꽁 숨기기에 급급했던 내 과거들이 살아 숨 쉬며 슬며시 자기 얘기를 꺼내왔다. 


사실 지금껏 서른이 다 되도록 제대로 해 놓은 것 하나 없다는 게 나는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이것저것 무언가 많이 하긴 한 것 같은데 남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그럴싸한 이력 하나 없는 내가 초라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조각난 실패의 경험들이 모두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특별한 경험과 스토리를 쌓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실패한 방황이라고만 여겼던 지난 시간들이 내 꿈으로 향하는 멋진 별을 점으로 찍어놓고 있었음을, 그 시간들 덕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는 거란 걸 깨달았다. 


방황하며 거친 곳들은 내 길이 아니라고, 마음속에서 외면하고 지워버리기 바빴는데. 내가 지나온 모든 곳들이 다 내 길로 연결되고 있었다니. 나는 결국 방황을 통해 진짜 내 길도, 내 방향도 모두 찾은 셈이었다. 게다가 늘 방황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시간을 낭비했다고 스스로 자책하곤 했는데, 그건 잘못도 아닐뿐더러 그 모든 과정이 모두 다 내 방향을 찾아 나가는 내 여정이었다니.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마음이 스며 나왔다. 그리곤 갑자기 내 가슴 안쪽 깊숙한 어딘가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그간의 방황을 무사히 지나 여기까지 온 나에게 감사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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