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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2. 이상한 꿈 이야기

‘남들은 다 취직해서 자리 잡고 있는데 나는 이제 와서 작가가 되겠다고? 게다가 난 제대로 된 글이라곤 써본 적도 없잖아. 그러다 또 실패하면, 그땐 정말 어쩌려고 그래.’  


진짜 꿈을 만난 내게 찾아온 건 낭만적인 두근거림과 뭐든 다 해낼 것 같은 패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안, 초조, 조급함, 두려움 같은 지질한 감정들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름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주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안에선 언제 책을 써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어엿한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 이러다 나만 영영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초조함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걱정과 불안에 허우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일단 뭐라도 써보자는 생각에 책상 앞에 앉아 컴퓨를 켰다. 키보드에 손을 얹고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온통 점점 커져만 가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지쳐 나도 모르게 그만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곤 순식간에 한 편의 판타지 영화 같은 이상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1차원의 직선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왜 그런 곳에 살고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그곳이 끝을 알 수 없는 직선 세계라는 인상이 선명했다. 언뜻 광활한 고속도로 한 복판에 있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꿈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직선 달리기 경주에 참가해야 하며 모든 것이 등수로 결정되는 세계였다.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곳이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그곳에서 뒤처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쉴 새 없이 헉헉대며 달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모두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아무도 멈추지 못했다.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순식간에 순위가 추락할 것이 뻔했고, 그게 두려워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나 역시도 어떻게든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추격당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릴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멈추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에 걸린 듯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사람들 무리에 떠밀려 눈 깜짝할 새 나는 직선 세계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고속도로 같은 그곳에서 밀려나 칠흑 같은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잠깐 사이에 허공 어디선가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비행물체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나를 낚아 채 기체 안으로 빨아들였다. 저승사자의 우주 버전인가 의아해하던 중 나도 모르게 의식을 잃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나를 납치한 비행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나는 내 키 만한 투명한 캡슐 같은 것에 싸여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투명한 막 같기도, 얇고 부드러운 유리 같기도 한 캡슐은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 안에서 나는 원하는 대로 사방의 모든 것을 전부 볼 수 있었다.  


망망대해 같은 허공 속에서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길’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길들이 허공 안에서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저마다 가지각색의 빛깔로 형형색색 빛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같은 색의 길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슷한 듯 보이는 색일지라도 길의 생김새도, 뻗은 방향도 전혀 달라서 두 길이 서로 다른 길이라는 걸 의심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처럼 모든 길들은 색뿐만 아니라 방향과 생김새마저 가지각색이었다. 길들은 대체로 구불구불하고 꼬여 있었으며 어떤 길은 위쪽으로 향하고 어떤 길은 옆으로 향했으며 또 어떤 길은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위니 아래니 하는 말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캡슐 안에서 방향을 바꾸면 옆이던 게 위가 되는 식이었다.


반짝이는 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위에 누군가가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길 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딱 한 사람만이 걷고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같이 경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어느 길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 멀리 다른 길 하나가 보였다. 그 길은 다른 길들과는 전혀 달랐다. 커다란 원형으로 생긴 그 길은 암흑 그 자체였다. 모든 빛을 빨아들인 듯 아무런 빛도 나지 않는 시커먼 길 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살기 위해 달아나는 개미 떼 같아 보였다.  


‘사람이 아니라 좀비 같아. 끔찍해.’ 나는 개미 행렬 같은 그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곳이 내가 조금 전까지 헉헉대며 달리고 있던 직선 세계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좀비 같아 보이는 저 사람들 무리 중 하나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길어야 수 분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당연한 듯이 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빠져나오길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니. 저 안에선 뭐가 그렇게 초조하고 심각했나 헛웃음이 났다.  


막연히 결승선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도 도무지 이 레이스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졌던 이유도 이제 분명해졌다. 나는 직선 세계가 아닌 쳇바퀴 같은 길 위에서 어디가 끝인지도 모른 채 무의미한 달리기를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결승선이 존재하는 직선 도로 위에 있는 것처럼 헐레벌떡 숨이 차도록 달려대고 있었다니. 튕겨져 나오길 천만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캡슐 안에서 그곳을 바라보며 저 안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차라리 주저앉거나 멈춰버려서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길 기도했다. 바깥으로 나와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바라보기만 해도 다시는 그곳에서 무의미한 달리기를 반복하지는 않게 될 테니까.  


그런 안도감과 씁쓸함이 섞인 묘한 기분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원형의 길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어디선가 나를 집어삼켰던 바로 그 비행물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가더니 캡슐을 씌워 다시 허공으로 내보냈다. ‘축하해요.’ 나는 저 멀리 캡슐 속 존재를 향해 읊조렸다.






그때 나를 씌운 캡슐 안에서 가슴 높이에 동그란 버튼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무엇에 쓰이는 버튼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주저 않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끌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만 향했을 뿐인데도 눈 깜짝할 새 나는 바로 그곳에 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캡슐은 내가 버튼을 누르고 어딘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곳이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나는 호기심이 드는 몇몇 길들을 기웃거렸고, 이 길이 별로면 저 길로 옮기고, 또다시 다른 길로 옮겨 다녔다. 나는 마치 허공 속에 펼쳐진 눈부신 길들을 탐험하는 여행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수많은 길 사이를 떠돌던 중, 허공 속에서 작고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캡슐 안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내 오른손 별에게로 향해 뻗었다. 그런데 손을 뻗은 그 순간, 알이 갈라지듯 사방으로 캡슐이 열리더니 별이 불쑥 내 앞으로 날아왔고, 그 작은 별에 손 끝이 닿자마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별에서 길 하나가 앞 뒤로 뻗어 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새도 없이 등 뒤에서 비치는 강렬한 빛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이내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칠흑 같은 허공이 아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편의 영화 같은 꿈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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