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분량의 브런치북입니다. 긴 호흡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년 전, 스산한 바람이 길거리의 낙엽을 휘몰던 어느 늦은 가을 월요일 아침. 서른을 코 앞에 둔 나는 새벽녘부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8시 58분, 59분, 9시... 곧 있으면 회사며 거래처며 나를 찾는 전화들이 수없이 울려댈 터였다. 조금 뒤 닥쳐올 상황을 떠올리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이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벌써 몇 달째 이런 상황이 아침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걱정에 휩싸여 겨우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금 온갖 숨 막히는 생각들에 휩싸이곤 했다. 마지못해 겨우 마음을 달래고 일어나 대충 씻고 아슬아슬하게 출근시간에 맞추어 출근한 뒤 좀비처럼 밀린 업무를 쉴 새 없이 처리하고 밤늦게 녹초가 되어 퇴근.
그래도 일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반복된 실패 끝에 어렵게 다시 시작한 일이었기에 나는 정말이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아니, 아주아주 독하게 일했다. 그게 내 지난 실패들을 책임지고 미래를 책임지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 보면 내가 늘 꿈꿔왔던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게 될 거라 믿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 건, 일을 시작한 지 육 개월쯤 지났을 무렵부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성과를 냈다 한들 보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일 자체가 싫어졌다고 하기엔 훨씬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 안에 에너지가 소진되는 듯한 무기력함. 나는 ‘번아웃’되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나는 육 개월을 더 꾸역꾸역 버텼다. 이상신호를 발견했음에도 ‘이러다 말겠지’하며 힘들어하는 나를 더 채찍질하곤 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다 망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 ‘이건 아닌데...’ 하는 불안한 고민을 간직한 채로.
그래도 버텨야지. 이제 겨우 일 년인걸. 내 인생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나는 매일같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채찍질하며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내 안에 어떤 끈이 툭, 끊어져버린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온통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단번에 결론이 났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이제는 그만 멈출 때라고. 몇 달씩이나 고민의 늪에 빠진 채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문제의 답을 찾았던 것이다.
지난 수개월의 고민이 무색하게 사실 답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렇게 분명하고 쉬운 답이 있는데 왜 몇 달 씩이나 고민하고 있었는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 뿐. 나는 겁쟁이였고, 이제껏 스스로를 괴로운 현실 속에 오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론 긴긴 고민의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늘 생각하곤 했었다. 이대로 그만두는 게 비겁한 도피가 아닐까 싶어서. 게다가 그렇게 꾸역꾸역 버틸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사실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이런저런 실패 끝에 겨우 찾은 일자리를 1년도 되지 않아 그만둔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내가 설 자리가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그래서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맡은 일을 해내려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억지로 애쓰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내 몸도, 마음도, 한 목소리로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도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내 몸이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보고 싶었다. 아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불쑥 뇌리를 스쳤던 탓이다.
결정이 확실해지자 마음 한편이 홀가분해졌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순 없지만 지금보다 더 힘들까 싶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난생처음으로 완전한 휴식기를 갖게 되었다. 할 일 없이 며칠이고 집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멍하니 누워있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지금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문득 내가 애써 무시했던 목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너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 이젠 그만해.’
그때 깨달았다. 이제껏 나를 위한다고, 내 행복을 위한 것이라 믿고 노력해왔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내가 나를 불행하게, 지치고 아프게 하고 있었다는 걸.
두 눈에서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눈물은 너무나 뜨겁고 아팠다. 나는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겨우 울음이 멈추고 조금 진정이 되자 의문이 들었다.
‘그래 맞아. 나는 너무 지쳤어. 이대로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런데 나... 왜 이렇게 지친 거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내 아픔의 진짜 원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의 삶에서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해답을 찾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하루는 춥고 싸늘한 거리를 정처없이 헤매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미움받을 용기》를 만났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진짜 ‘내 인생’을 살라고 말해준 것은.
그때 내 삶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그동안 시도했던 일들이 모두 다 실패로 끝나버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나날 속에 나는 그저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런데 책 한 권이 내게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픈 진짜 이유는 단지 지난날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내 인생에 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서른이 다 되도록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왔다는 절망감이 나를 미치도록 아프게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순수함과 꿈과 희망과 용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나는 언제부터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걸까. 내 인생을 어떻게든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여기까지 숨차게 달려왔는데, 사실은 내 방향이 어딘지도 모른 채 다들 향하는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아등바등 달려대고 있었다니. 그게 내가 지금 이렇게 완전히 지쳐버린 이유였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이유였다.
‘내 삶에 내가 없이 무작정 달리기만 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완전히 지쳐버린 거야. 그러고 보니 나는 내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길을 무작정 달리고 있었네.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이제라도 내 삶을 살래. 진짜 내 삶을. 내 길을, 나의 방향을 찾을래.’
더 이상 주저앉아 울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책이 내게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이제라도 진짜 내 삶을 찾아 나서야 했다. 한 번뿐인 내 소중한 삶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진짜 내 삶을 살자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자고, 이제부터라도 진짜 나의 방향을 찾아 나아가자고, 그렇게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게 읊조렸다. 내가 나의 방향과 일치되어 살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이십 대가 끝나갈 무렵 처음으로 나만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소중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조금씩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한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지금껏 한 번도 알려해 본 적 없던 ‘진짜 나’를 발견해나갔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안의 진짜 나는 처음부터 쉽게 문을 열어주진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눈을 감고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처음 만난 내 안의 나는 나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어렸을 적의 수많은 꿈들, 내 십 대를 지켜준 뮤지션과 그들의 노래들, 내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던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작품들, 순수한 즐거움에 환하게 웃고 기뻐하던 순간들, 깊숙이 숨겨져 있던 진짜 내 모습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진짜 모습을 하나 둘 발견할 때마다 오랜 방랑 끝에 안전한 집에 온 듯 그저 편안하고 아늑했다. 여기서라면 다시 뭐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이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즐겼다. 그때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수줍게 외쳤다.
‘글을 써보고 싶어. 늘 꿈이었잖아.’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글 쓰며 사는 삶. 이건 내가 오래전 가슴 한편에 묻어둔 소박하지만 소중한 소망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늘 가슴속 저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진짜 꿈’이었다.
맞아, 내 꿈. 나도 진짜 꿈이 있었지. 잊고 있던 심연 속 기억들이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과 글을 참 좋아했다. 다이어리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집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책을 읽다 좋은 구절이 나오면 색색의 볼펜들로 정성스레 다이어리에 옮겨 적어두곤 했는데 그렇게 적어둔 보물 같은 글들이 수백 편에 달했던 기억이 났다.
그제야 집안 이곳저곳을 뒤져가며 기억 속 다이어리를 찾아봤지만 내가 내팽개쳐버린 꿈처럼 다이어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이어리처럼 나는 내 인생도 팽개쳐버린 걸까... 휴, 어쩔 수 없겠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아직 내겐 많은 날이 남아있어. 사라진 물건을 되돌릴 순 없다 해도 꿈을 다시 되돌리는 건 얼마든 가능한 일이야. 이젠 더 이상 내 꿈도, 내 삶도, 방치하지 않을 거야.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글을 써 보는 거야. 꿈꿔왔던 나만의 책을 써보는 거야.’
글을 쓰고 싶다는 꿈, 내가 작가가 된다는 희망에 참 오랜만에 부푼 꿈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 다 되어 진짜 꿈을 찾았다. 그날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반가움과 설렘도 잠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