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연 Oct 19. 2023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기

그건 뭘 하든 명상과 비슷하다

내가 의도해서 움직이는 몸


스파인 스트레치


보기에는 특별히 어려워 보이는 동작도 아닌 것 같고, 화려한 동작도 아니죠. 다리 펴고 등을 구부리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실제로 해봐도 이게 어떤 운동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 움직임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첫 번째 움직임은 땅바닥에 있는 다리가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힘 있게 앞 쪽으로 뻗어나가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체도 앞쪽으로 힘 없이 넘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척추를 길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큰 공에 닿지 않고 넘어가려는 것처럼. 내가 의도해서 팔과 척추가 앞 쪽을 향해서 길어지려는 힘을 쓰고, 또 그 힘에 몸통의 다른 부분들이 그냥 힘 없이 끌려가버리지 않고, 버텨내며 저항하는 코어의 힘도 쓰고 있죠. 그리고 코어의 힘과 연결된 하지의 힘까지. 몸통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저항하는 힘들을 쓰면서 결국은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가는 것, 그 과정에서 척추가 정말 스프링처럼 '리프팅'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허리의 무게가 허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등까지 끌어올려서 진짜 척추의 마디마디 사이에 공간이 늘어나는 거죠. 그걸 제대로 느끼면서 만들어갈 수 있어야 진짜 동작의 이름인, '스파인 스트레치'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다리를 쭉 펴고 굽은 등으로 힘을 빼고 늘어져 있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것 같은데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움직임이죠.


의도해서 스파인 스트레치를 하는 것과, 의식 없이 등을 구부리고 있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혹은 내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등이 구부러져서 저렇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의도해서 움직인 것과, 무의식적인 반응.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힘을 써보려고 한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해서 그저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내가 의도해서 감정을 느껴주기, 감정 수용


제가 이전 글에서 감정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걸 저항하지 않고, 합리화하거나, 억지로 긍정화 시키려고 하지도 않고, 충분히 느껴주고 나면 감정이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얘기했었죠. 내 감정과, 내 마음과 1cm의 간격도 없는 완전한 포옹. 그렇게 나를 수용해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 사랑, 자기 수용, 나의 못난 면도 부족한 면도 따지지 않고 탓하지 않고 받아 들어줄 수 있는 것.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자꾸 나의 부족한 면과, 모자란 부분들에 수치심을 느끼고, 극복해내려고 하고, 나아지려고 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이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얼마나 외로울까요. '이걸 빨리 고쳐서 없애야 해.'라고 내가 계속 그 아이를 향해 말하고 있다면요.


작은 부분부터 시작해 볼까요. 당장 나의 치명적인 단점을 받아들여! 무조건 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라고 외친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 부족한 부분들로 인해 나에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을 겁니다. 창피함, 민망함, 혹은 화가 남, 수치심, 숨고 싶고, 외면해버리거나, 버려질 것 같고, 비난받을 것 같고, 미움받을 것 같고,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수많은 감정. 그 감정들을 충분히 느껴줍니다. 감정을 먼저 수용하는 거예요.


내가 극복하고 싶은 어떤 단점, 고치고 싶은 나의 어떤 특징, 혹은 없애버리고 싶은 나의 어떤 부분들에 의해서 생기는 감정들. 내가 그것들을 고치고 없애고 극복하고 싶은 것은 반대로,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싶어서 일 겁니다. 그렇게 극복된 나는 더 이상 창피하지 않고, 수치스럽지 않고, 숨고 싶지 않고, 당당하고, 무시당하지 않고, 미움받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대 감정.


그 부족한 부분은 어쩌면 내가 나에게 일어나는 감정들을 계속 외면하고, 아냐 나는 괜찮은 점도 있어, 싫어 나는 이걸 고쳐서 없애버릴 거야, 힘들어 나는 너랑 함께 있으면서 이 감정들을 겪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어, 하고 봐주지 않아서 계속 찾아온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힘들지만 그 감정들을 가진 내 마음 안에 내면아이를 잘 바라봐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움직이다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답답할 때, 이게 왜 아직도 안되지? 라며 나를 탓할 때, 이 정도 했으면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내 몸을 원망할 때, 그 몸의 한 부분 한 부분을 내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이라고 생각해 보자(물론 딸은 없지만요), 가장 아끼는 동생, 가장 아끼는 조카, 너무 사랑하는 어떤 작고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해 보자 하고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왜 아직도 안되냐고, 왜 아직도 안 고쳐지냐고, 왜 아직도 안 없어졌냐고.


감정을 마주 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무거워요. 우울함도, 수치심도, 무기력함도, 깊은 분노와 실망감 버려졌다는 감정도.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집니다. 그럴수록 그 감정들은 또 한 번 버려지고, 실망하고,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기도 하고, 당장에 진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무기력함을 느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의도해서 움직이는 마음


척추 뼈들 사이에 틈을 만들듯이, 내가 마주한 상황과 내가 하는 반응 사에에 간격을 조금 만들어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일상의 75% 이상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고 해요. 내가 항상 행동하던 대로, 자동화되어 있는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는 거죠. 그래서 그 말과 행동과 반응을 의식해 봅니다.


고유수용 감각을 이용해 몸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움직임의 질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내가 이 공간에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어느 정도의 각도로, 얼마나 흔들리며 혹은 흔들리지 않으며 서있는지를 인지하는 것처럼. 내가 하는 말과, 행동, 반응을 의식하고 인지해봅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답하는구나, 내가 저런 말에는 이런 반응을 하는구나,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니 나도 모르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구나. 그걸 기록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기록을 하면서 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살펴보고 관찰해 줄 수 있거든요.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그렇게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기도 하면서 내 무의식적인 반응과 나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거죠.


감정도 마찬가지로요, 내가 화가 났다고 해서 냅다 화를 냈다고 감정이 수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적이 별로 없다면 한번 그렇게 해보는 경험도 해보세요. 근데 이 과정을 잘 생각해 보면 내가 한 번도 이런 반응을 해본 적이 없으니, 한번 해보자 하면서 내가 의도해서 그렇게 한 거죠? 어떤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도해서 그렇게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한동안 어떤 감정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 감정 속으로 충분히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바다에 빠지듯이 그 감정과 충분히 함께 있으며 느껴주기도 합니다. 이것도 내가 의도해서 하는 거죠.


화가 나서 화에 휘둘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이 화로 인해 나의 어떤 부분들이 건드려졌을까, 이런 감정을 느낀 가장 처음은 언제일까,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서 받아들인 걸까, 의식하고 기록하면서 감정과 나 사이에 틈을 만들어봅니다. 그리고 그 화를 충분히 느껴주어야 한다면 충분히 함께 있어줍니다. 정말 많이 성난 아이의 생떼를 다 받아준다고 생각하면서요. 얼마나 화가 나고, 얼마나 서운하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두 들어줍니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친구가 있다면, 이 아이에게 어떻게 해줄까. 그 역할을 내가 다시 나에게 해주는 것이죠. 감정과 무의식에 휘둘린 반응, 즉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고 의도해서 한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죠. 위에 설명했던 '스파인 스트레치' 동작처럼요. 감정 수용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의도해서 거기 있는 것과 그냥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의 차이죠.




그렇다면 제대로 된 몸과 마음의 움직임은 어떻게 시작할까요


위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여기에 이런 관절과 근육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시작입니다. 평소에 굳어서 불편감이 느껴지지 않으면요, 내 근육과 뼈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느껴보거나 생각한 적이 얼마나 있을까요?


여기에 이런 관절이 있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시작이듯이, 하루의 나의 감정과 기분을 잘 관찰하고 기록해 줍니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듯이, 처음에는 가볍게 적어보기 시작한 감정들, 적는 것이 낯설고 귀찮다면 하루에 10분이라도 가만히 오늘 나의 감정의 흐름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시작입니다.


명상 중에 바디스캔이라는 명상이 있죠, 내 몸의 구석구석을 느껴주는 것입니다. 혹시 감정이 무뎌져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몸의 감각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지금 들리는 소리, 지금 맡아지는 냄새, 살갗에 느껴지는 감촉과 온도, 습기 등을 느껴보는 것이죠.


*


그래서 저는 지금 어디쯤에 있냐고요? 저는 몸을 통해서는 같은 움직임도 다르게 움직이고, 다른 움직임도 결국 같은 원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 배운 것을 통해 아직 배워나가고 있는 단계예요. 지금은 감정을 제대로 수용해 주는 것을 연습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내 마음을 인지하고, 기록하고, 의식하고, 의도해서 움직여보는 단계. 무의식적인 반응과 내 마음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감정과 나 사이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면서요. 내가 안 해봤던 말이나 행동도 의도적으로 해보기도 하고,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감정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도 합니다. 못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지나친 강박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족쇄를 풀어주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서 저항감이 느껴질 수도 있죠. 몸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피하고 싶고 유독 나에게만 어렵고 힘든 동작이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봐주어야 하는 근육들, 움직임, 관절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말했듯, 억지로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잘 못하는 티저라는 동작을 잘하기 위해서 티저만 연습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꼭 티저만 맨날 연습해야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소개한 스파인 스트레치 동작으로 후면사슬의 신장성 움직임을 이끌어 내고, 기본적은 코어 운동을 하는 날도 있을 테고, 고관절의 가볍고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기능을 회복해 주는 하루를 쌓아갈 수 도 있죠.


무의식적으로 자동화된 뇌를 통해 내 방어기제와, 저항, 안 좋은 습관들을 무지성으로 반복하고 있지 않도록. 인지하고 의식해서 내 의도대로 움직여 보는 것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몸을 통해 배웠듯 마음으로도 실천을 해보고 있어요.


다음 글이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은데요, 다음 글에서는 제가 티저를 어떻게 완성했는지, 아니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과정인지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 21화 그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