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명상요가 수련하러 가는 날
3일 차
오늘은 이번 달부터 시작한 명상 요가 수업을 들으면서 명상.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책
<사랑 사용법> 맷칸
에고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두려움을 먹은 에고는 우리에게 불안, 슬픔, 우울, 화, 수치심, 질투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에고를 없앨 수 없을까?
에고는 필연적으로 육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고,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 경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꼭 필요한 존재.
그렇다면 자아는 뭘까? 자아는 ‘참나’
순수한 나, 순수한 나는 사랑 그 자체이다.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저 발견하고 느끼는 것.
어제 했던 명상에서의 깨달음과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책의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사랑하라
내가 다니는 클래스의 이 달의 주제는 사랑. 그리고 목표 동작은 바 카사나, 까마귀 자세이다.
이 자세를 연습하기 위해서 등을 대고 누워 복부 힘으로 다리를 끌어당겨 엉덩이가 땅에 닿지 않게 하고, 팔과 다리는 서로 밀어내는 힘, 손바닥으로는 천장을 밀어내는 것처럼 힘을 유지했다.
등을 대고 해 보는 것인데도 엄청 힘들다. 근데 내가 이걸 손만 땅에 짚고 할 수 있을까?
그대로 일어나서 손을 땅에 짚고 하니 힘이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상태로 팔로 버티며 얼른 발을 떼려고만 한다. 나도 모르게 조급해진 마음.
‘아까 누워서 힘쓴 것처럼 해보자.’
마음을 다시 먹고, 꼭 발을 떼려는 게 아니라 아까 연습했던 복부의 힘과, 팔과 다리가 서로 밀어내는 팽팽한 힘, 손바닥으로 천장을 밀어냈듯이 땅을 미는 힘을 유지해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순간 발이 가볍게 들리는 것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같은 자세, 같은 힘을 유지하면 되는 건데 위치와 방향이 바뀌니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저 동작을 해내려고, 얼른 발을 떼내려고. 발을 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정확한 힘을 쓰면서 유지하고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 더 본질적인 목표일 텐데 말이다.
평소에도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다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도, 언제쯤 유명해질까? 언제쯤 저렇게 잘 팔리는 작가가 될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라며, 성급하게 발을 떼려고만 하지 않았나. 발을 떼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었잖아.
그리고 기쁘게도 발을 떼고 들고 있었던 그 순간, 누군가 알아보고 칭찬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슬며시 들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오! 잘하셨네요!’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 인정 욕구가 마음 건강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 나를 유심히 봐주고, 내가 어떤 성취를 이뤘을 때 적절한 반응을 해주었다면 나는 지금쯤 더 건강한 어른이 되었을까?
여기서 요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내 생각은 과거를 헤집고 있다. 내가 아니까 괜찮다. 내가 제일 잘 알아주자. 잠도 잘 못 자고 일어나서 아침부터 요가를 하러 제시간에 왔고, 열심히 하려고 애쓴 것. 포기하지 않은 것. 힘을 제대로 써보려고 집중해서 노력한 것.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던 나의 첫 요가 수업은 사바아사나(송장 자세)로 마무리되었다.
좀 전까지 했던 것들은 모두 잊고, 보내는 시간.
‘아... 너무 못한 것 같은데, 아까 와일드 띵할 때 순간 동작을 놓쳐서 바보처럼 멍하니 있었네.’ 등등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과 나의 부족한 모습을 그저 보내주고, 현재에 있기. 지금의 숨에 집중해보기.
요가하는 동안은 내가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수용하기. 강사라는 생각은 접어두고. 배우고 수련하러 간 거니까 조바심 내지 않기로 오늘의 내 마음을 토닥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