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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짜로 살았던 걸까?

책 《가짜 노동》을 읽고 태도의 격변 전과 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눈에 바짝 들어온 책이 있었다. 노동에 관한 책은 맞는데, 가짜 노동이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하필 그 시기는 이번에 재직하고 있는 회사에서 나는 어떤 경험을 얻을 수 있을지(포트폴리오),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적성)이 맞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제목은 심플해도, 인권 일지, 노동에 대한 허상인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노동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되는 것일까? 단 숨에 이끌렸고 목차를 둘러보았다.


내가 F(감정)유형이라 그런지 작가의 문체는 키보드가 열이 나게 두드리고 바쁘게 써내린 글의 냄새가 났다. 급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행정 처리가 가득한 업무로부터 뛰쳐나와 노동, 직장, 업무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듯한 분위기로 보였다. 두꺼운 외형과 달리, 빠르게 읽히는 책이다.


323p. 노동은 인간의 내면을 외면화시키고 외부를 내면화시키는 활동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 안에서 환경 안에서 자리를 찾는다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하곤했다. 이간은 일할 때, 즉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자유롭다.


280p. 다음 답변은 직업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언가 결과를 낳는다/ 흥미롭다/ 행복하게 해준다/ 쓸모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다른 사람을 돕게 해준다/ 잠재력을 개발해준다


사람은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의지를 찾고 행동하게 된다. 우리는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 행위를 선호하고, 또 사회에서 잉여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을 하기도 하고, 또 개인적인 의미를 더해 자아실현과 직업적 목표를 두고 하기도 한다.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점차 고학력자가 늘어나고 더 고차원적인 노동이 가능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노동 시장에서는 오히려 공급 과잉으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해도, 더 큰 일을 주지 못하고 파이를 여럿으로 나누어 일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책의 비유를 빌리자면, 생산적인 사람이 명예의 징표를 갖기 때문에 스스로가 잉여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 크게 위축될 수 있다. 


150p. 부러운 인물의 가치를 획득하고 흉내 내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상, 새로운 상류층의 바쁜 삶은 점차 성공과 진보의 동의어가 되었다. 지난 세기 후반이 사람들이 바쁘다고 말하는 경향이 증가한 이유는 조너선 거셔니의 표현에 의하면, 진짜 할 일이 많아서라기 보다 그것이 ‘명예의 새로운 징표’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85p. 실질적인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업무 성과를 측정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겁니다. 인사,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홍보팀뿐만이 아니라 판매팀까지도요. 고객 하나를 새로 얻는데 100명의 직원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 중 누구 공이 제일 클까요? 아무도 자격이 없을 수 있어요. 어쩌면 경쟁이 심하지 않아서 그 회사의 상품이 1위가 되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면서도 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방도가 딱히 없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가장 생산적으로 일했던 시기는 에이전시에 근무할 때였다. 아웃룩 일정으로 30분 단위로 업무를 계획하고, 실제로 일을 해내고, 기록하고, 시간당 퍼포먼스를 계산해 개인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일을 가장 빠르게 쳐내고, 효율적으로 하는 사람이 유능하게 보였고, 그런 동료 N은 늘 바빠 보였다. 궁금한 걸 묻거나 상의하고 싶어도 그(혹은 그녀)의 몰입 중이라는 굳은 표정은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아, 이메일을 보내거나 메신저로 조심스럽게 ‘당신은 나에게 시간을 내어줄 것인지’ 틈을 엿봐야 했다.


다른 부서에 있는 동료 W와 우연히 마주치는 장소는 늘 화장실이었다. 시간당 퍼포먼스라는 평가 시스템은 개인이 일하고 쉬는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기에 (아니, 가능할지 모르지만, 훌륭하게 온오프를 골라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나마 휴식시간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우리가 묻던 안부의 기준은 “오늘도 바쁘냐, 요즘도 바쁘냐, 이번 주도 바쁘냐는 소리였다.” 물론 친하지 않아서 불쑥 꺼낸 말이기도 한데, 한 번도 우리는 여유 있다는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2년 넘게 생산적으로 살다 보니, 나는 물미역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짜 ‘가짜로 한 노동’은 아니지만 명예의 징표를 2년 동안 갖고 있었다. 


282p. 세번째 전략은 일을 천천히 하는 것이고, 네번째는 딴짓하는 것이다. 뉴스나 책을 읽고 온라인 채팅을 하거나 책상을 꾸민다. 그러나 이런 모든 허위 활동도 수치심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지루해진 노동자는 결국 고립감을 느낀다. 누구에게도 이 모든 무위를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238p. 가짜 노동을 깨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이 ‘소외된 정상성’의 거울방 안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가짜 노동은 끊임없이 다시 자기 위에 반영되며 더욱 많은 가짜노동, 허위 프로젝트, 허위 지위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차츰 소외된 것이 규범이 된다. 정말 그런거라면, 다음과 같이 질문했을 때 어떤 대답을 들어도 믿기가 어려워진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고객, 시민, 회사, 국가, 세계에 중요합니까?’ 어쩌면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를 쓰는데 너무 단련돼서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어느 수준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계속 바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욕구 때문에 그 인식이 억눌린다. 게다가 가짜 노동이 바쁠 기회를 풍부히 제공하기에 개인은 이 충격적 진실로 부터 보호될 뿐 아니라, 무의미한 일을 계속 지속한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있는 시점에서는 크게 공감했다. 내가 정말 쓸데없는 일 자체게 매몰되어 하루를 감정적으로 허비하고, 낭비하고, 불합리한 노동을 하는 것 같아 진짜 노동을 찾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찾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다소 격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완독 후, 책을 덮고 며칠 뒤에 다시 되짚어 보면 이 책이 자칫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 고용주와 계약한 형태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 적 있는 노동자로서, 이 책이 말하는 ‘노동’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일을 묘사하는 것 같다.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이며, 그래서 어떤 형태로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작가는 ‘노동 시스템의 패러다임’에 대한 변화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며, 선구자적 시각을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논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군중도 여럿 존재한다. 더 많은 대중이 가짜 노동을 인식하고, 자각하고, 변화하려는 계몽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도 매분, 매초 이뤄지고 있는 거대한 노동 역사가 바뀌는 것은 다음 생이나, 다음 생에서나, 다른 세계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 조직에 계약 형태로 노동력을 제공했던 노동자로서, 일에 대한 정의를 한 번 더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됐으면 그것으로 이 책은 충분히 나에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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