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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기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문보영 에세이 일기시대의 엉뚱명랑한 작가의 생활을 보면서

일상과 생활에서 하나의 과정을 콕 찝어서 써보라고 하면 어떨까? 그것도 유명한 작가들이 쓴다면?

어떻게 이런 기획을 떠올린 거지? 기획한 분을 꼭 만나고 싶을 정도로 나는 민음사의 문학론 에세이 시리즈는 딱 내 취향이다. 도서관에서 소설만세와 일기시대 2권을 빌려왔다. 소설만세는 이미 누군가가 인스타에 찍어올린 사진과 글을 본 적 있어서 궁금했고 일기시대는 스무살 때부터 줄곧 일기를 끼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이 일기를 주제로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냈는 지 궁금해져서 읽게 됐다. (나는 이렇게 책을 집을 때마다 이유가 뚜렷한 것 같네)


어릴 때 일기란 것은 매일 밤마다 쓰고 책가방에 넣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지난 날을 왜 적어야 하는 지 이유 같은 건 물을 수조차 없었고,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기도 하다.


담임 선생님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더라도 매일 나만의 비밀(공유해 버렸으니까 더 이상 비밀이라고 볼 수 없다.)을 보여드린 후 빨간 펜으로 검사 표시가 남겨진다. 방학이 되면 밀린 빨래를 처하듯이 한 번에 몰아서 적는 그런 과제 폭풍 같은 것이었다.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고, 일기를 안 써도 되는 중학생이 될 때 무지하게 크게 해방감을 느꼈다.


다 큰 어른이 쓰는 일기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여러모로 유익하다. 일단 매일 적을 필요가 없다. 적고 싶을 때 꺼내면 된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는다. 누가 보지 않는다. 오롯이 나와의 대화 기록일 뿐이다. 지나간 일상을 다시 떠올리며 기억을 최대한 늦게 지워지도록 노력하는 행위이자, 몇 일 동안 누린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일기장을 짚을 때는 뇌에서 신호가 올 때이다. 물이 채워진 컵을 비워내듯이, 어느정도 생각의 용량이 채워지면 꺼내야 될 때가 온다. 만약 물이 가득 찰 때까지 일기라는 청소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물이 흘러 넘쳐 결국 퍼지고 만다. 마음은 수용성이라서 다른 곳까지 퍼지게 되면, 몸의 움직임까지 둔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경우에만 해당된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경험은 아마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도 20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매년 다르다. 1년에 1개를 쓰지 않고, 무선 노트에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분량으로, 원하는 시간에 적는다. 매년 고르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 왜냐면 1년 내내 봐야하기 때문에 종이가 빨리 헤져서도 안 되고 가장 무난하고 잔잔한 것들 중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일기장은 누가 보지 않는 위치에 쏘옥 넣어두지만, 결국 가장 자주 찾게 된다. 일기장을 다 쓰면 모아두는 곳은 침대 옆인데, 침대 옆 책장에는 그야말로 다 써서 죽어버린 일기장 무덤이 있다. 작가님의 일기 무덤은 방 구조 중 어디 쯤에 위치해 있을까?


작가만의 일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3가지다. 매일 새벽. 혼자만의 적막한 시간. 일기가 시작될 때마다 작가의 방 구조. 특히 방의 구조는 상황에 대한 몰입감을 더 살려주는 양념 같은 느낌이 되는 것 같다. 함께 일기를 적는 작가 시점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엉뚱 발랄한 작가의 문체와 삼천포로 빠져도 실망스럽지 않은 일기시대 책. 작가를 mbti는 왠지 INFP가 아닐까 넘겨짚어보았다. 책 속에서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재미있는 지점이 꽤 많았다.


70p. 망함구간이론: 도약 직전에 발 빠짐 모양의 망함 구간이 존재함
102p. 재능은 뭔가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보다 오래 좋아하는 지구력이라고 생각한다.
119p. 나는 칭친하면 망가지거든. 그러니 난 잘 되어도 도망가고. 망해도 도망가게 되어 있어. 누가 날 좋게 생각하면 미칠 것 같거든. 난 칭찬하면 고장 나 버려/그런데 넌 고장나도 사랑스러울 거야/사람들이 나를 열심히 고장내면 완전히 다른 게 될 수도 있겠지? 사실은 진짜 고장나 버려도 좋으니까.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게 되는 거지
148p. 그런데 내 방에서 혼자인 것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인 것은 다른 외로움이다. 둘 다 혼자인 것은 맞지만, 도서관에서의 외로움은 함께하는 외로움이고, 내 방에서의 외로움은 혼자 하는 외루임이다. 전자가 있어야 후자도 견딜 수 있기에 도서관에 간다.
149p. 시험공부는 친구랑 같이 할 수 있지만 일기는 친구 옆에서 쓰기 어렵다.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고요한 공간에서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아마 친구와 떨어져 앉아도 같은 공간에서는 일기를 쓰기 어려울 것같다. 나에게 무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혹은 내 방에서만 일기를 쓸 수 있다. 나는 일기를 쓰면서 발생한다.
182p. 언어가 정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시적일 수 있듯이, 삶에서 본질적인 형식이 부정되더라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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