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시작이라는 본질적 고뇌
계절이 시체처럼 눕던 겨울의 장막이 서서히 걷힌다. 근육처럼 긴장하던 표면에 균열이 번지고, 그 틈마다 미세한 온기가 스며든다. 봄이다. 냉각된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세상은 살아남은 존재들을 다시 호명한다.
복수초가 전령이 되어 생경한 노란빛을 터뜨리면, 생명을 유지한 존재들은 어긋난 열기 사이로 기어오른다. 개구리의 도약과 새싹의 돌진이 야기한 무질서 속에서, 벌통에도 소란이 깃든다. 매년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어느 해의 ‘생명’도 이전과 동일하지 않다.
겨울은 벌에게 절대적인 시험이다. 추위와 마주하여 생명을 걸고 덤비는 싸움. 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강박적으로 결집한다. 원형의 중심엔 여왕이 놓이고, 일벌들은 쉼 없이 교대하며 바깥의 냉기를 막아선다. 이 반복된 돌봄이 곧 생존의 근거다.
벌의 몸짓에서 나오는 느리고 가느다란 움직임은 거대한 법정의 선고와도 같다. 여왕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생존을 확신할 수 없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바닥에 내몰리는 자, 살아남아 중심에 스며드는 자의 운명이 갈린다. 견뎌냄과 추락, 쓸쓸함과 환희가 교차하는 삶의 교향곡.
봄의 색채가 깊어지고 나서야 벌은 인공의 건축물을 해체한다. 겹겹이 쌓았던 방어막을 풀고, 빛과 바람 속에 몸을 털어낸다. 방어막을 풀어 나온 벌이 처음 마주하는 건 멈춰버린 동료의 시간이다. 살아남은 무리가 밟고 선 시작이란, 결국 부재 위에 놓인 재건이다.
생존한 무리는 잠시 주춤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사라진 동료의 빈자리가 자아낸 만성적 공백을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기 위해 여왕의 출산을 서두른다. 결핍과 부재로 힘에 부쳐도 흐트러짐 하나 없다. 매년 봄 이어지는 벌의 재건 사업은 충만함으로 시작될 수 없음을 아는 지혜다.
사실 시작의 전장은 늘 불안정하다. 출발선이 넉넉한 경우란 거의 없다. 부유와 빈곤은 생명에게 무작정 내려진 것이다. 『주역』 둔괘(屯卦)의 한 구절처럼,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처음 만나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는 자리엔 반드시 ‘어려움’이 생긴다. 어색함과 저항, 낯섦 속에서만 뭔가를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미약함, 서투름, 충돌, 어색함이란 배경 위에 출발선을 긋는다. 역설적이지만 숙명적 결핍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갈림길 앞에 선 나의 선택만이 앞길을 비춘다.
벌은 빈곤함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동료의 죽음에 짧은 애도만 뿌려낸다. 살아남은 자는 동료와 다시 협력한다. 빠르게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본연의 역할에 존재의 위치를 환원한다. 눈앞의 삶,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의 역할만 반복하는 것. 소박해 보이지만 최선의 경주가 미약한 시작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맹자(孟子)는, 주어진 환경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찾았다. 바꿀 수 없는 태생적 환경과 조건에 집착하기보다 당장 쥐고 뛸 수 있는 일상의 능동적 자세가 삶의 기운을 바꾼다는 말이다. 끝없이 느꼈던 결핍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집착이었는지 모른다. 집착을 놓고 냉철하게 관조하는 나의 위치만이 삶에 희망을 주는 것일까.
나는 ‘시작’이라는 한 단어에서 하얗게 비워진 여백을 본다. 결핍은 언젠가 넘어야 할 벽이지만 용기 있게 펜을 들고 무언가 그려낸 자만이 삶을 영위한다. 충돌과 흐트러짐 속에도 생명은 반짝이고 주저와 망설임 속에도 설렘이 살아있다. 막 추위를 견뎌낸 꿀벌 사회가 보여주듯이.
아마 우리는 미약한 출발에 서 있는 사회의 벌들인지 모른다.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 길을 오직 자아가 그려낸 의지와 감각만으로 건너는 길을 배워야 한다. 어느 순간 길을 놓칠 수도 있지만 괜찮다. 그마저 삶의 한 장면일 뿐이다.
찬 바람이 다시 세상을 누빈다. 벌들은 또 한 번 시험을 준비하며 서로의 몸을 엮어 버틴다. 생존과 죽음, 추위와 기다림이 차례로 벌통을 통과한다. 그들은 비관하지 않는다. 부재도, 추위도, 다음 봄도 생의 단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모든 운명을 감내하는 모습 안에서, 인간의 의지조차 미처 닿지 못하는 생의 지혜가 가끔 벌 쪽에서 먼저 건네진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