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의 이면
위대함이란 대개 미약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지식의 대량 보급을 견인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지식 기득권에게 외면받았다. 페니실린 역시 알렉산더 플레밍의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된 균의 흔적에 불과했다. 거대한 변화는 언제나 성실한 반복의 끝자락에 탄생한다. ‘위대함’이란 거창한 행위보다 사소한 집요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꿀벌의 서사도 미약한 움직임 위에 구축된다. 벌이 만든 위대함은 결과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움직임이 쌓여 형성되는 구조다. 『주역』 곤괘(䷁)의 질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순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부드럽지만 중심이 단단한 체계.
곤괘의 상징은 땅이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임을 수용하고 침묵 속에 생명을 조직한다. 곤괘를 “지극히 부드럽되 그 움직임은 강하다 [至柔而動也剛]”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강함은 고요한 지속성에서 나오고 위대함은 고요 속에 축적된다. 전복된 힘의 방향이다.
일벌의 행태는 곤괘의 미학을 드러낸다. 그들의 삶은 짧다. 40일 남짓 기록되는 생애 동안 일벌은 하루를 단위로 질서를 쌓는다. 청소에서 시작해 여왕벌 보필로, 채집과 방어로 이어진다. 휴식은 없다. 주어진 것에 대한 순종이 반복의 축을 이룬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순종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생존과 미래에 있다. 목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 그들은 유순함을 버린다. 눈빛을 바꾸고, 변화를 도모한다. 여왕벌의 훼손이 그 신호다.
사실 여왕벌은 권력자가 아니다. 알을 낳을 뿐 군림하지 않는다. 일벌은 그의 존재를 주시한다. 하루 평균 2,000개의 알을 낳지 못하는 순간 그는 제거 대상으로 전락한다. 교체의 과정은 냉혹하다. 일벌은 새로운 여왕을 만들고, 새로운 여왕은 그를 죽인다. 행위에 감정을 얹지 않는다. 오직 생존의 언어가 질서를 이끈다. 무표정한 질서 속에 공동체의 미래가 태어난다.
삶이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다는 건 이 때문이다. 단순한 원리의 축적은 지난한 시간을 요구한다. 하찮은 행위가 모이고 미약한 반복이 쌓여 앞으로 나아간다. 한걸음에 도달할 수 있는 도착점은 없다. 성취의 이면에 수없는 발자국이 남는 이유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인생은 곤괘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지만 현실은 땅 위에 흘러간다. 삶은 격렬한 추진력보다 견고한 인내로 유지된다. 끝없이 다져진 땅이 있어야 발을 굴러 하늘로 도약할 수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혁명적 도약도 결국 미세한 지속이 일궈낸 결과임을. 순간순간 닥쳐오는 감정의 파도에 망각할 뿐이다.
오늘도 양봉장의 벌들은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반복하고, 반복에 쓸데없는 감정을 섞지 않는다. 그들의 날갯짓은 작고 발끝은 가늘다. 문득 하찮은 몸짓이 숭고해 보인다. 꿀벌의 위대함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태어났다. 보이지 않는 토대, 반복하는 미약한 손끝, 그리고 고요히 쌓인 작은 일상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