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소년에게

반장 선거- 단편소설

by 전석표

“반장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이야? 정말… 우리 반만 왜 이러니?”


입후보자가 한 명뿐인 칠판을 두드리는 선생님의 손끝에는 실망이 묻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선거 없이 반장이 결정될 판이었다.


“보이스 비 앰비셔스 라는 말도 모르나? 남자로 태어나놓고 야망이 없으면 되겠어?”


호열은 창가 쪽 중간 자리에서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물론, 그의 손도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나 말고 누구든 도전해라.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멋진 지원자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오, 만재야!”


호열의 짝, 만재가 자리에서 커다란 풍채를 일으켰다.


“뭐해 너희들! 박수들 안 줘?”


호열이 먼저 손뼉을 치자 반 친구들도 ‘오오’ 하며 따라 박수를 보냈다. 선생님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만재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전호열 학생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 그래… 아니, 나?”


호열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추천도 좋다. 이유는?”

“아니, 선생님 잠시만요 저는—”

“왜냐하면 이 친구는 멍청해서 제가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


엉뚱한 이유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호열은 분개한 표정으로 만재를 노려보다가 급히 선생님에게 항의했다.


“저 반장 선거 나갈 생각 없습니다!”

“오케이, 전호열 적어.”

“…예?”

“멍청하다는 건 순수하다는 거고, 조종할 수 있다는 건 헌신할 수 있다는 뜻이지.”

“누가요! 누가 그런 말을—”


호열의 외침은 허공에 묻혔다. 선생님의 분필이 칠판 위로 미끄러졌다.


[기호 나, 전호열 군]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뽀얗게 남았다.


“이로써 입후보 신청을 마감하겠다! 후보자들은 나와서 발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라!”

“와 1대 1…!”

“이게 진짜 남자의 투표지.”

“아니, 아니 내가 동의를 안 했다고!”


그제야 도서관인 줄로만 알았던 교실 분위기도 환하게 밝아졌다. 모두가 바쁘게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가운데, 호열의 손만은 옆에 앉은 만재의 멱살을 붙들고 있었다. 만재의 머리가 행사 풍선처럼 저항없이 흔들렸다.

“제 공약은 여기까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호 1번 친구의 연설이 끝났다. 확실히 세밀한 공약이 있었고, 반장 자리에 욕심이 있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다음 후보로, 호열이 책상 앞에 설 차례였다.

호열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한 오 초를 지나 보냈다.


“발표 안 해?”


한 친구가 멍하니 있는 호열을 보고 말하자, 호열은 계속 우물거리기만 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오곡백과 물드는, 4월인데요.”

“4월에 물들어?”

“너무 일찍 아니야?”

“아, 뭐….”


그대로 또 십 초가 흘렀다. 또 한 친구가 항의하듯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다시 호열의 입이 움직였다. 사실 지금도 뭘 말해야 할 진 모르겠는데….


“그… 저는, 지금까지도 가장 아끼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그 순간 학생들의 표정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표정의 의미를 읽은 호열이었지만,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다섯 살 때, 주말마다 아빠가 항상 저를 데리고 동네에 작은 목욕탕을 데려갔었거든요.”


급우들이 웅성였다. 쟤 뭔 말을 하려는 거야? 실실대는 웃음도 들려왔다. 그러나 호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빠랑 같이 목욕탕에서 씻고 나면, 나올 땐 항상 바나나 우유를 마실 수 있어서 그게 좋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에 제가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처음으로 아빠보고 그랬대요. 손으로 한식딥을 가리키면서, 나 된장찌개 먹어보고 싶다고.”


선거 공약 말 안해? 쟤 지금 무슨 자린지 헷갈렸나? 급우들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몇몇은 호열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보았다.


“그때 아빠가 저를 데리고 한식집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된장찌개가 되었고, 된장찌개 먹을 때마다 항상 그때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던 호열이 문득 입가를 슬며시 올려 웃었다. 호열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시엔 몰랐거든요. 그냥 바나나 우유 마시고, 된장찌개 먹었고… 그게 다인 평범한 기억인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떠올리니까 그때 그 시간이 되게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냥 생각이 나면, 자연스레 웃어요.”

어느덧 웃음은 호열의 입가로 옮겨와 있었다. 친구들도 호열에게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호열은, 그러한 얼굴 하나하나와 시선을 나누며 말했다.


“자금 이 고등학생 시절도 다섯 살의 그때 그 추억같이, 어쩌면 우리에게 시간이 지나서 훗날 돌아봤을 때 가장 소중하게 남아있을 기억이 돼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저는… 실은 뭐, 공약이랄 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진 않고요. 대신 이거 하나 꼭 지키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교실 맨 뒤, 사물함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우며 호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이 돼서 지금 이 순간,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때 기억되는 장면 하나하나 우리 얼굴에 떠오른 게 웃음이었으면 좋겠어요. 한 장 한 장씩 넘겨도, 어떤 일들이어도 그저 웃고 있는 얼굴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잖아요. 저는 이 시절을 그렇게 반짝이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반장이 되면… 할 수 있는 건 우리 반 친구들과 다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재밌게 놀고 웃을 수 있는 반을 만들어 갈래요. 여러분이 기대하는 공약을 꺼내지는 못 해서 죄송하지만, 이게 제 진심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진심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반징이 되지 않더라도요.”


호열은 쑥스러운 듯 한 번 더 입꼬리를 올렸다. 아, 이제 그만 말해야겠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호열은 마지막으로 입을 뗐다.


“어른이 된 우리는 분명 지금보다도 더 멋있어져 있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의 반짝임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만들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공부만 해야 하는 고등학생 2학년이라기보단, 인생의 빛나는 열여덟로 충실하고 싶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호열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연설을 끝냈다. 모두가 말없이 호열을 바라보았다. 자리로 돌아오자 만재가 물었다.


“저기, 대통령 할 겨?”


투표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접힌 종이 하나하나를 펴들고, 종이 속 이름 석 자를 말하며 칠판에 획을 하나씩 그었다. 그런 시간이 흘러 마침내 마지막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선생님은 칠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17대 12. 우리 반 1학기 반장은 호열이로 결정됐다.”

“우오오!”

“호열이 멋있었어!”

“어쩌면, 반장하려고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었을까?”


호열만은 어안이 벙벙한 듯, 실감이 안 나는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반장은 나와서 소감 말해.”


선생님의 부름에 호열이 엉거주춤 앞으로 나왔다. 호열은, 부끄러운 듯 자꾸 웃음만 지삳가 입을 열었다.


“…너무 다 그렇게 쳐다보면 민망하다.”

“뭘 할 말 다 해 놓고 민망하대.”

“너 웅변학원 다니지?”


다시 친구들을 바라보았을 때, 모두가 서로 닮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호열은 쑥스러웠지만, 이윽고 친구들에게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박수가 쏟아졌다.

이미 그 순간부터, 호열의 말처럼 열여덟의 시간은 충실하게 반짝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