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샥 축글 _ 열 세 번째 글
승강제가 도입되어있는 리그에서 대체적인 승격 팀들의 목표는 ‘잔류’이다. 하지만 잔류라는 목표는 승격 팀에게 꽤나 어려운 과제다. 시즌 초반에 돌풍을 일으키는 승격 팀들이 가끔 주목을 받곤 하지만, 리그의 중후반부로 갈수록 위력을 잃고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에는 강등을 피하기 위한 하위권 경쟁을 펼친 끝에 가까스로 잔류에 성공하거나, 승격의 기쁨을 누린 지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되는 결말이 대체적인 승격 팀들의 시나리오다. 실제로 올해 K리그 클래식에서는 수원FC가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켰지만 점차 힘을 잃으며 결국 강등이라는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승격 팀들이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진 않는다. 우리가 지난 시즌에 봤던 레스터 시티 동화의 결말은 보통의 승격 팀 시나리오를 뒤엎었다. 정확히 승격 시즌은 아니었지만, 프리미어리그 승격(14-15 시즌) 이후 맞이했던 두 번째 시즌(15-16 시즌)에서 레스터 시티는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자리에 오르며 세계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지난 시즌 잉글랜드의 작은 도시 레스터에서 불었던 ‘승격 팀 돌풍’이 이번 시즌에는 독일로 자리를 옮긴 모양새다. 2009년 창단되어 올 시즌 구단 최초로 분데스리가를 경험하고 있는 RB 라이프치히가 현재 12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며 리그 단독 1위에 올라있다. 바이에른 뮌헨도 도르트문트도 아닌 생소한 팀이 분데스리가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은 독일 팬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도 무척 낯선 광경이다. 과연 RB 라이프치히는 대체 어떤 팀이며, 그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RB 라이프치히의 선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들의 모기업 레드불이 축구계에 등장한 과정에 주목해봐야 한다. 자산 가치 약 7조원에 달하는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레드불은 주로 익스트림 스포츠에 집중된 투자 전략을 펼치던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 들어 축구계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고, 막대한 기업 자산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팀들을 인수하는 ‘레드불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오스트리아의 “FC 레드불 잘츠부르크”, 미국의 “뉴욕 레드 불스”, 브라질의 “레드불 브라질” 과 같은 팀들이 ‘레드불 프로젝트’ 하에 인수된 팀들이며, 지금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팀을 분데스리가의 RB 라이프치히라고 보면 된다. ‘레드불 프로젝트’는 세계 각국의 레드불 팀에서 성장시킨 유망주들을 RB 라이프치히로 올려 보내고, 최종적으로 RB 라이프치히를 분데스리가 우승권 팀으로 성장시킨다는 취지의 대형 프로젝트이다. 따라서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에서 뛰고 있는 대한민국의 황희찬도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뒤 RB 라이프치히로 건너가 분데스리가 진출을 이뤄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레드불은 2009년 독일 5부리그 소속이던 SSV 마르크란슈테트라는 팀을 인수하며 지금의 RB 라이프치히로 팀을 재 창단시켰다. 레드불은 하부리그 팀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며 팀에 날개를 달아줬고, RB 라이프치히는 창단 7년 만에 분데스리가 승격이라는 대업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이런 신선한 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 팬들이 RB 라이프치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독일 분데스리가는 역사적으로 축구의 지나친 상업화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다른 유럽 리그들과 달리, 거대한 재력가나 기업이 자금력을 통해 구단을 쉽게 소유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방지한다. ‘50+1’이라는 정책을 통해 20년 이상 구단을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기업이 구단을 운영하게 될 시에는 최초에 스폰서의 형태로 최대 49%의 지분만 획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레드불은 RB 라이프치히에 대해 49% 이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고만 알려져 있고 정확한 주식 보유 현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상업화를 지양하기 위해 팀의 이름에 기업명이 사용되는 것 또한 규제하고 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부터 유지됐던 VFL 볼프스부르크와 바이엘 레버쿠젠은 예외다.) 따라서 RB 라이프치히는 팀의 엠블럼으로 레드불 마크를 그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팀 이름 역시 ‘Red Bull' 라이프치히가 아닌 ’Rasen Ballsport' 라이프치히로 정해야만 했다. (Rasen Ballsport는 독일어로 ‘잔디 위의 공’이라고 직역되며 축구라는 스포츠를 의미한다.)
분데스리가는 돈에 의해 움직이는 상업화된 리그를 지양하고, 팬들의 노력과 연고 지역의 발전을 통해 리그가 함께 성장하는 ‘팬 중심의 리그’ 형태를 추구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특정 팀이 모기업의 재정 상황에 의존한 채 급성장하거나 갑자기 몰락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RB 라이프치히가 레드불이라는 거대 오스트리아 기업의 자금력을 등에 업고 독일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적 가치에 균열을 일으키려 하자, 독일 팬들로서는 RB 라이프치히의 돌풍을 마냥 고운 시선으로 지켜볼 수 없는 따름이었다.
하지만 레드불에게도 돈을 투자하는 본인들만의 철학이 있다. 그들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슈퍼스타를 영입하여 팀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철저히 젊고 유망한 선수들 위주로 영입하여 스스로 키워내겠다는 그들의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시즌 RB 라이프치히는 리그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어린 팀이며, 어린 선수들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직선적이고 도전적인 축구로 분데스리가를 주도하고 있다.
RB 라이프치히는 오늘 새벽 있었던 프라이부르크와의 원정 경기에서 4:1 승리를 거두며 무패 행진을 또 다시 이어갔다. 6라운드 이후 7연승을 기록하며 승점 30점 고지에 가장 먼저 올랐으며, 오늘 밤에 열릴 다른 팀들의 결과와 상관없이 단독 1위 자리를 확보했다. 2위 팀 바이에른 뮌헨이 오늘 승리를 추가하더라도 여전히 RB 라이프치히가 승점 3점 앞서며 1위를 유지하게 된다.
2강 체제가 확실한 분데스리가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이나 도르트문트가 아닌 다른 팀이 1위 자리에 오르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다른 팀이 레버쿠젠도 샬케도 아닌 승격 팀 RB 라이프치히이며, 그들이 12라운드 까지 무패를 달리며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 축구 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이제야 리그의 1/3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RB 라이프치히가 지난 시즌의 레스터 시티처럼 또 하나의 우승 신화를 쓰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레드불이라는 날개를 뒤에 업은 RB 라이프치히가 분데스리가에 불러온 변화의 바람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것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레드불 프로젝트’의 1차 결과물과도 같은 RB 라이프치히의 돌풍을 계속해서 흥미롭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