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소중한 무계획

J에게도 P의 순간이 필요해

by hosu네

처음 출근했던 날을 기억하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무엇을 하는 그날 일기를 적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입학, 첫 발령, 첫 전보, 첫 해외여행. 처음이라는 건 얼마나 설레는 날인가. 무언가가 '바뀌는' 그 순간.

무슨 일을 하든, 직장에 들어와 1년, 3년, 그리고 n 년이 지나고 나면 이직을 한다고 해도 처음의 그 감정과 같지는 못할 것이다. 높은 확률로 어린 나이의 내가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돈을 받는 일을 한다는 건-아, 나는 학교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확실하게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그 새로운 날로부터 십몇 년이 지난 이후 나의 삶은 다시 똑같아졌다. 비슷한 시간 기상하고, 출근을 한다. 비슷한 시간 퇴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잠시 노닥거리다가 잠을 청하는. 그런 비슷한 하루하루. 비슷하다는 건 아늑하기도 하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내가 마련한 나의 자리이기 때문에 변수가 없다.


이럴 때는 작은 변화에도 많은 게 달라지는 법이다. 지난주 남편이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 먼 곳이 아니라 내 퇴근 후 함께 갔다.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막히는 길이었다. 차에서 버리는 시간이 싫었던 우리는 오랜만에 계획적이지 않은 행동을 해봤다. 일단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았다. 지도에서 하나하나 눌러보다가 근처의 국숫집에 갔다. 주말 같으면 사람도 많고 정신없었을 위치의 식당이었는데,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아무도 없는 식당이 왠지 좋았다. 오랜만에 J의 P 같은 나들이 느낌이랄까.


밥을 먹고 다시 집에 가는 길을 찍어보았다. 아직도 평상시의 두 배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남편은 인근 아웃렛에 가보자고 했다. 순간 머릿속에 '이번 주 예산 펑크 났는데!'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매달, 매주 예산을 세우는데 당연히 이번 주에 아웃렛을 가는 가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중 저녁에 아웃렛을 가는 건 괜히 우리를 신나게 했다.


평소 같으면 시끌벅적했던 아웃렛은 비가 와서 그런가 차분했다. 요새 운동복에 관심이 많은 우리는 아디다스, 나이키 등등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50% 할인하는 매장에서 말 그대로 득템을 했다. 나이가 먹어서 이제 검은색은 거들떠도 안보는 우리 부부에게 딱 맞게 원색의 티셔츠들을 들고 붓점 리듬에 맞추어 주차장으로 갔다. 남편이 말했다.


"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

그러게. 나도 오늘 너무 재미있었다. 이상하게 주말에 계획 세워서 외식하고 아웃렛 갔을 때보다, 오늘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 예산에 어긋난 소비를 했음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으레 느껴지는 기 빨림도 없었고, 남편이 사준 폴바셋 라테도 좀 더 맛있게 느껴졌다. 항상 계획 세워서 실패하지 않는 외출만 했었는데 왜 무계획이었던 오늘이 그렇게 즐거웠을까. 똑같지 않은 날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남편과 집에 가면서, 그리고 오늘 출근을 하면서도 즐거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 우리 다시 가자.라고 말했지만, 계획적으로 다시 가면 이 맛이 살지 않을 걸 안다. 어느 날 피곤한 퇴근길에 우리 그냥 놀러 가자라고 용기 있게 말해야겠다. 인생에 작은 무계획도 꼭 필요하단 걸 이제는 아니까.

작가의 이전글적당한 거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