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의 시점
[주의]
※ 이 글에는 ‘죽음’과 ‘기억의 그림자’를 통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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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자 (혜선의 시점)
그녀는 상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직접 두고 간 것처럼.
그녀는 열어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문자 메시지를 떠올리고, 이건 분명 자신에게 온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몇 장의 사진과 USB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어느 한 장에서도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았다. 일곱 장의 사진 속 그녀는 모두 높은 하이힐과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가죽 소재의 원피스도 있었다. 멋지지만 상큼함은 느껴지지 않는 명품 재킷들을 걸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의 표정은 공허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생기가 없었다.
혜선은 사진 속 여자가 낯설었다. 자신이 남의 물건을 가져온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사진을 다시 상자에 넣으려던 순간, USB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보고 싶었다.
그녀는 컴퓨터에 USB를 꽂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속 여자가 보였다. 누군가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다.
혜선은 순간 불안했다.
‘이러다 범죄에 연루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영상은 이미 재생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훔쳐보는 사람처럼 화면을 바라봤다. 장면은 짜깁기된 영상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건너편 집의 유리창 너머로 그 여자가 찍히고 있었다. 잠시, 그 여자의 시선이 카메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여전히, 그녀의 방이 보였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목을 맸다.
혜선은 멍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다, 화면을 꺼버렸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걸까.’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36층 꼭대기,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그녀는 커튼을 다시 닫고, 문을 열어 조심스레 복도를 살펴본다. 바닥도 다시 확인한다. 아무것도 없다.
‘혹시 저 맞은편 남자에게 갈 물건이었을까?’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걸 지금 건네줬다가, 내가 위험한 물건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물건을 들고 들어온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영상을 재생한 이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혜선은 그런 계산에는 서툴렀다. 잠시 가족에게 전화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더욱이 안 된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곧 결심한다. USB를 끝까지 확인해, 거짓이거나 장난이라는 단서를 찾자.
혜선이 모니터 전원을 다시 켰을 때, 영상은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병원 같았다. 그녀가 들것에 실려 어딘가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
그녀는 순간 이상한 장면을 본 것 같았다. 어딘가 낯설지 않다. 그녀는 영상을 되돌리고 어느 지점에서 정지를 누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화면 한쪽,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 아버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녀는 확신했다. 이 USB는 자신의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걸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뒤엉켜 머리가 어지러웠다. 카메라는 문밖에서 방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여는 순간,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화면이 밝은 실내로 바뀌었다.
그녀는 다시 아버지를 보았다. 그리고 동생 윤아도 있었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가자, 윤아의 어깨에 가려졌던 장면이 드러났다.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카메라가 천천히 줌인하며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혜선은 그 장면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모니터 속에는, 한 달 전 심장이식을 받고 누워 있는 —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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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개]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다중성과,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분열과 통합을 다룬 심리소설입니다.
융의 ‘Self–Persona–Shadow’ 개념을 바탕으로, 기억과 망각, 침묵과 거짓 사이에서 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사랑은 나를 하나로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는가?”
사랑이 존재의 통합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고, 그 시선 속에서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려 합니다.
이 소설은 사랑과 정체성을 실험하는 심리소설이자, 복제된 자아의 시대를 사유하는 실존적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