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의 시점
11. 현기증 (혜선의 시점)
발소리가 사방으로 튄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오직 어둠, 그리고 정적, 그리고 울려 퍼지는 거친 숨소리와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발소리.
여기는 어디일까.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제발 일어나, 정신 차려.
그녀는 도대체 왜 자신이 뛰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악착같이 뛰어야만 하는 건가.
혜선은 멈춰 섰다. 싸늘한 공기가 그녀를 애워싼다. 이런 고독은 느껴본 적이 없다. 자신을 부서트릴 것만 같은 고독감, 부서질 것만 같은 불안감, 알 수 없는 섬뜩한 감정들이 자신의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감으로 인한 이 어지러운 현기증을 버텨낼 조금의 힘조차 없었다.
혜선은 심장을 움켜쥐고 벽에 기댄 채 몸을 수그렸다. 이 엄청난 공황에 그녀가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공포로 질려버렸다.
바로 그 순간, 멀리 아련한 불빛이 보였다.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진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작은 골방 안에 누군가 서 있다. 서 있는 여자는 말없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처음부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여인이 길고 섬세한 손 안에 자그마한 병을 보였다. 혜선는 그 병 안에 분명 행복해지는 하얀 공기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본인이 어째서 그 병에 관해서, 또한 그 병 안에 든 것이 하얀 기체인 것인지, 그리고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혜선은 병을 건네받았다. 여인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고, 골방은 너무도 따뜻했다. 혜선은 그 여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본 적 없는 낯선 여인의 얼굴이 볼수록 익숙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혜선은 여인을 바라보며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만져본다. 자신의 눈가를, 코를 천천히 더듬어 본다. 그리고 입가를. 순간, 혜선이 여인의 불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봤을 때, 분명 바라보던 여인은 사라지고, 그 여인은 자신이 되어 혜선를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은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 커튼이 흩날린다. 새벽 3시 12분, 그녀가 잠에서 깼다. 이 현기증은 도무지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혜선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눈가를, 콧등을,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 쭈그려 자신의 팔에 얼굴을 포개 묻으며, “다행이다.”를 연신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여인 앞에 서 있던 자신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아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한 감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 여인의 얼굴과 꼭 같은 표정으로.
그 날, 혜선은 영상을 보고 나서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상자 안에 USB와 사진을 넣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수납장,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윗칸 안쪽에 그 상자를 넣었다.
그런다음, 혜선은 따뜻한 우유를 담은 머그컵을 집어 들고,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틀어진 라디오에서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혜선은 우유를 마시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깼을 때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나고 오늘, 그녀는 이런 꿈을 꿨다.
그리고 퀭한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혼란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립감을 느낀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다. 심장이 스스로 심박을 조율하고, 온도를 조절하며 그녀의 기분을 마음대로 휘젓고 있었다. 그 기분이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온갖 불안을 만들어냈다. 혜선은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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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개]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다중성과,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분열과 통합을 다룬 심리소설입니다.
융의 ‘Self–Persona–Shadow’ 개념을 바탕으로, 기억과 망각, 침묵과 거짓 사이에서 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사랑은 나를 하나로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는가?”
사랑이 존재의 통합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고, 그 시선 속에서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려 합니다.
이 소설은 사랑과 정체성을 실험하는 심리소설이자, 복제된 자아의 시대를 사유하는 실존적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