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아군 - 렐리에고스(30km)
5시 20분에 일어났다. Sue 랑 둘이서 4인실을 써서인지 조용하고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 자고 있던 그녀를 배려해 나름 조용히 물건 정리한다고 했는데 조금 시끄럽지 않았나 나중에서야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와 베개에 끼우라고 주었던 일회용 시트도 침대에 끼워둔 채로 그대로 두고 나왔다. 분명 어제 ‘퇴실할 때 수거해서 쓰레기통에 넣어달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또 깜박한 거다.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참 고마운 알베르게인데....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 없어서 후원을 못하는 게 죄송했다.
6시 14분 출발. 오늘도 별이 쏟아지는 은하수 끝을 보며 걷는다. 다른 날과 다른 점은 30km의 거리 부담으로 배낭을 동키로 미리 보낸 것. 동키 업체에 예약전화를 안 해서 살짝 불안했지만 다른 순례자들이 동키로 부칠 배낭이 알베르게 입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고 애써 안심하며, 어제 사아군에서 산 보조가방을 메고 용감하게 도로를 따라 길을 나섰다.... 가 너무 어두워서 고속도로를 탈 뻔했다. 가지고 있는 헤드라이트가 싸구려라 그런지 건전지를 아무리 갈아 끼워도 달빛보다도 어두울 지경이었는데 그래서 갓길 중간중간에 있는 까미노 표시를 읽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다. 다행히 앞서 가던 한국인들도 비슷한 지점에서 헤매고 있었고 나보다는 밝은 헤드라이트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헤매던 지점은 부르고로 가는 길과 에르마니요스로 가는 길로 나뉘는 지점 즈음이었는데 난 그중 후자를 택했다. 로마 때부터 있었다는 전통적인 길이라는 설명에 혹했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길은 오래된 로마의 길은 맞지만 전통적인 가톨릭 순례길은 아니라고한다) 그 길을 지나는 작은 마을 칼사다 데 코토에서 아침을 먹을까 했는데 문 연 Bar가 없었다.
일출의 장관을 바라보는 것으로 문 두드리며 울부짖는 공복의 감각에서 애써 눈을 돌려가며 두 시간 정도를 더 걸어 에르마니요스에 도착했다. 멀리서 마을이 보일 때부터 위장이 마치 심장처럼 두근거리며 뛰던 참이라 마을로 들어서서 처음 보이는 Bar에 들어서자마자 또르띠야가 있는지부터 물었다. 스무날을 걸으며, 마치 뜨끈한 국밥 같은 느낌으로 자주 먹었던 또르띠야가 없다는 말을 듣고 슬픈 표정을 지었더니, 또르띠야 비슷한 게 들어간 샌드위치가 있다고 한다. 대신 가격이 4유로라고 한다. 수중에 현금이라곤 13유로 정도뿐이라 길에서 돈을 많이 썼다간 오늘 저녁 숙박 요금이 간당간당할 처지였지만 그래도 배고픈 게 먼저다.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가 접시에 놓인 채로 서빙된 음식을 받았다. 바게트 사이에 또르띠야 일지 계란 지단 일지 모를 계란이 들어있었는데 그 크기가 성인 남자 신발 사이즈 정도 되는 크기라 한참 동안을 뜯어먹어야 했다. 평소에 2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었는데 이 정도 사이즈라면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다른 식사는 더 안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한참 만에 쉬면서 발가락도 말렸고 배도 불렀으니 가방끈 조이고 다시 출발!
어느새 완전히 떠오른 태양은 작은 배낭만 걸친 내 등과 어깨를 날카롭게 찌르기 시작한다. 칼사다 에르마니요스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끝도 없는 밭 사이에 난 널찍한 길을 걸으며 고대 로마 황제는 이 길을 전차를 타고 갔겠지만 여러분은 걸어가야 한다는 안내책자의 놀림 같은 말이 생각났다. 쉴만한 공간이 걷는 동안 한 군데 정도뿐이라 전에 걸었던 콘데스~칼사디아 구간보다 더 힘든 느낌이었다. 얼마 없는 그늘마다 조금씩 쉬어가며 렐리에고스 5km 남겨두고 마지막 휴식을 하러 길 가에 있던, 아마도 밀이나 옥수수 수확 용품을 보관할 것 같은 큰 창고를 향해 다가갔다. 창고 옆의 그늘 아래 쌓여있는 나무판자에 걸터앉아 있는 미국인 부부와 합석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던 몇 시간 전의 결심이 무색하게 ) 가방에 있던 빵을 뜯어먹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신사와 인사하고 나니 역시나, ‘왜 한국인이 이 순례길에 이렇게 많은 거냐’고 아마도 500번째정도 들었을 질문과,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의외의) 첫 번째 질문을 받았다.
간단한 인사와 숙소 예약용 영어만 간신히 할 줄 아는 내겐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질문이었기에 그저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정도로 밖에 대답해야 했다. 대충 대답은 했지만 스스로 영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그들이 준 쿠키 하나를 입에 물고 자리를 일어선 이후부터 걷는 내내 머릿속에 한미-북미-한일관계에 대한 영작의 향연이 펼쳐졌다.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미치는 서너 가지의 영향을 어느 정도 정돈된 영어로 구사할 수 있을 때쯤 저 멀리 렐리에고스가 나타났다. 마을까지 이어지는 하얀 길과 그 덕분에 더 파랗게 보이는 하늘, 확실히 더 걷다간 불타 죽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영어공부고 한미관계고,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마을에 입성했다.
이틀 전 미리 예약했었던 알베르게는 뒤늦게 확인한 결과 평이 좋지 않아서 그 대신 공립 알베르게로 체크인하는데, 주인아저씨가 난데없이 한국어와 한글 자랑을 어마어마하게 늘어놓으신다. 예전에 묶었던 한국인이 알려주었다며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물론 획순이 맞지 않아 거의 그리는 수준이었지만) 적어 보여주었다. 몇 가지 한국어도 자랑스럽게 구사하는 동안 정작 체크인에 필요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아서, 나중에 들어온 주인의 딸이 한숨을 쉬며 그 일들을 해주었다.
체크인을 끝내고 예약했던 알베르게에 동키로 보냈었던 짐을 가지러 가는데, J 씨 커플을 또 만났다! 그분들은 나와는 반대로 공립 알베르게로 짐을 보내 놓고 내가 예약했던 알베르게로 옮겨서 체크인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공립 알베르게에 베드 버그가 한 차례 창궐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 가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이미 체크인 한 곳이 얼마 전에 베드 버그가 나타났다니...! 잠시 혼돈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가 싶었지만 베드 버그가 한번 나오면 알베르게 전체를 소독하고 다 뒤집어서 오히려 더 깔끔하다는 정보와, 베드 버그는 늘 자기의 짐에서 옮겨 온다는 세미나에서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애써 진정하기로 했다.
약 열흘 전 산토도밍고에서 인출했던 현금이 거의 소진되어 숙소 체크인 5유로를 제외하고 수중에 남은 게 3유로 정도라 내일 아침밥먹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바로 다음날 묶을 곳이 레온이라는 대도시라, 현금인출기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최대한 그전까지 아끼고 버틸 작정이었는데, 사정을 들은 J 씨 커플이 흔쾌히 10유로를 빌려주겠다고 나선다. 어차피 레온에서도 또 만날 테고, 당장 몇 유로가 모자라서 궁하게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나는 이들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이렇게 대가 없이 무언갈 베풀지를 못하는데, 이 길 위에선 그런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자꾸 만나게 된다. 감사히 빌린 돈으로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작은 슈퍼에서 오늘내일 마실 물과 빵, 맥주, (일본식) 컵라면을 샀다.
숙소에 돌아와서 일본식 컵라면을 개봉하고, 순례길 동안 소중히 가지고 다녔던 진라면 수프를 일본 컵라면에 조금 섞었더니 그럭저럭 먹을만한 맛이 난다.
샤워도 하고, 빨래도 마치고 낮잠도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으러 마을에 두 개 있는 바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아까 받은 10유로에서 5유로 정도가 남아서 그 돈으로 간단한 맥주와 타파스 정도 먹을 생각이었는데, 혹시나 하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10유로 이상은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고 한다. 마침 디너 정식이 10유로라, 카드로 결제하면 현금도 아낄 수 있겠다 싶어 그렇게 주문하고 앉아서 같이 서빙된 와인 한 병부터 홀짝이기 시작했다.
펜네면으로 만든 파스타와 많은 채소와 함께 놓인 닭고기 구이를 먹고 있으려니 어제, 그제 만났던 (내 마음대로) 뒷 그룹으로 생각했던 사람들도 바에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와인을 나눠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고 일어나서 계산하려고 보니 주인이 갑자기 기계가 안된다고 한다. 아까까지 잘 됐던 거 같은데 갑자기 안된다고?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카드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멀쩡히 잘 되던 기계가 고장 난 척하는 거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런 생각은 많은 도움과 따뜻함을 만났던 이 순례길에서는 특히 하고 싶지 않았다.
1센트라도 긁어모아보려고 동전지갑을 뒤집어 탈탈 털고 있는 내게 조금 전 같이 밥을 먹었던 , 그리고 그저께 함께 노을을 보았던 YH가 10유로짜리 지폐를 내민다. 괜찮다고,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자 이내 그 지폐를 바로 사장에게 건넨다. 카드가 안 되는 것엔 으쓱하고 말던 사장은 YH가 건넨 돈을 재빨리 받고선 해맑게 잘 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당사자는 개입할 여지도 없이 계산이 끝나(?) 버리고 나는 가게 밖으로 YH를 뒤쫓아 나가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으로 어쩌자고 그러시냐 물으니, 다음에 만나면 그때 갚으라고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연락처도 없고, 같은 길을 걷는다고는 하지만 걷는 속도나 일정에 따라 못 만날 경우도 많은데 (J 씨 커플은 거의 2주일을 걸으며 걷는 거리나 스타일이 비슷한 걸 알고 있기라도 했지만 이분은 그런 데이터도 없다) 어쩌자고 한국돈으로 14000원 정도 되는 금액을 훌쩍 대신 계산해주시는지, 또 나는 어떻게 그렇게 훌쩍 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뒤로 몇 번 그날 만났던 뒷 그룹 멤버들을 다시 마주쳤지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YH 씨, 그 사람만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