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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Jan 04. 2021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다섯 번째 날

아스토르가-폰세바돈(27km)


요란한 밤



   청각적으로 엄청난 밤이었다.

  전날 오후,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 4인실에 나와 함께 묶게 된 세 명의 순레자가 나를 둘러싸고 무언가를 말하려 애썼는데, 어느 나라 출신인진 알 수 없었지만 영어도, 한국어도, 스페인어로도 소통이 안 되는 건 확실했다. 세명의 심각하고 다급한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긴장했는데, 그들의 바디랭귀지를 찬찬히 보니 그들은 오늘 밤에  자신들이 코를 많이 골 거라며 나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 중이었다! 

 

 수십 명이 한 방에서 자는 알베르게에서도, 몇 명이 자는 알베르게에서도 코를 고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종종 코를 골다 내 코골이 소리에 깨는 경우가 있었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해주었다. 나의 괜찮다는 몸짓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정말 심각한 얼굴로 자신들이 오늘 굉장히 피곤한 상태라 소리가 엄청 클 거라는 몸짓을 해 보였고,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에게 귀마개가 있다. 너무 걱정 말라’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제야 그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많이 피곤하다던, 그래서 코골이가 굉장히 심할 거라던 그들의 우려 섞인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나는 새벽 내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 명이 동시에 내뿜는 코골이는 웬만한 코골이와 외부 소음에서 완벽하게 나를 차단시켜주던 귀마개를 뚫고 나의 잠을 깨우려 했다. 하지만 피곤하기로는 나 역시 그들 못지않았기에, 학창 시절 수업시간 그랬듯 소음(?) 속에서도 숙면할 수 있었고, 다행히 일어났을 때도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5시 40분 기상, 늘 그랬듯 옆 침대에 잠든 다른 순례자를 생각해서 가방에 소지품을 대충 쓸어 담고 지하 식당으로 가서 어제 만들어둔 햄버거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6시 49분에 출발했다. 아스토르가 시내는 해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잠겨 아직은 깨어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반나절 머무르고 돌아다녀봤다고 그새 정이 든 것인지, 마을의 여러 광장을 지날 때 왠지 정겨운 마음이 들어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대성당 옆 골목을 지날 때 어제 아스토르가에 들어올 때 만났던 미기를 다시 만났다. 같은 숙소에 묵었건만 워낙 순례자들이 많아서 그런가 체크인 이후로는 만나지를 못했는데, 이렇게 또 아스토르가 근처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천천히 걷겠다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아스토르가를 빠져나갔다. 가로등만 듬성듬성 있던 길가의 작은 성당에서 어제를 무사히 걷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청원기도를 드리고 다시 별들 사이로 걸었다. 


서쪽으로 가는길, 해는 늘 등 뒤에서 뜬다. 롱다리 샷을 건질 수 있다.


빠르게 걸은  이유



   안개가 가득했던 어제보단 확실히 밝았지만 너무 추워서 버퍼를 뒤집어쓰고서 빠르게 걸었다. 배가 크게 고프진 않아서 마을 하나는 그냥 지나쳤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걸어 해가 뜬 후에 나타난 산타 카나리나 마을에 들러 바에 앉아 2시간 만에 발을 말리며 카페 콘 라체와 어제 만든 햄버거, 어제 샀던 작은 과자도 먹었다. 


  30분 정도 쉬다가 다시 출발해 걷다가 작은 마을 엘 간소에 이르러서 잠깐 쉴까 고민했지만 1시간도 채 안  걸은 상태라 계속 걷기로 했다. 해가 떠서 많이 춥지 않아 후드 집업만 가방에 걸어놓고 다시 출발했다. 한적한 차도 옆으로 한참 까미노가 이어지나 싶더니 곧 산길로 접어든다. 


  새벽부터 빠르게 걸었던 이유는, 중간 기착지인 라바날 데 까미노에서 할 중요한 일이 두 가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와 주일미사였는데, 이곳에서 판다는 김치와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과, 오늘 걷는 마을 중 이곳에서만 미사가 있다는 생각(중 어느 쪽이 더 컸는지는 잘 모르겠다)에 풍경도 잘 보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을 오르막 와중에 추월해가며 라바날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에선 좀 떨어진 곳에 처음 있는 알베르게 겸 바에 들어가서 '오라리오 미싸, 매스 타임'이라고 물어보니 직원들끼리 잠깐 이야기하더니 12시라고 알려준다. 30분 넘게 여유롭게 남아있어서 감사합니다 땡큐 하며 나와서 마을로 쭉 들어가 라면을 파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이 알베르게가 순례자들 사이에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직접 담근 김치를 라면과 함께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순례길에서 먹을 수 있었던 김치는 기껏해야 수출된 통조림 김치였는데, (물론 그나마도 없는 것보단 나았지만) 묵은지도 새김치도 아닌 맛이라 살짝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캔에 절여진 김치가 아닌, 직접 담근 김치와 라면 한 젓가락을 먹는 순간 힘들게 오르막을 걸었던 고단함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국 떠나서 먹은 라면들 통틀어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계란까지 풀은 진짜 한국 라면에 직접 담근 맛있는 김치까지! 젓가락도 주셔서 정말 맛있게 후루룩 할 수 있었다.


신부님과 미사 


  급하(지만 야무지)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성당으로 가려고 보니 이곳에서 알려주는 미사 시간은 또 12시 30분이다. 뭐가 맞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12시 전에 성당에 들어갔다. 12시 30분으로 생각하고 늑장 부리다가 알고 보니 12시 미사인 거면 늦는 것이니 차라리 일찍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성당에 들어갔는데 불이 꺼져있었고 신부님 한 분만 어두운 독서대 앞에 서 계셨다. 미사라고 하기엔 촛불도 없고 신자로 보이는 사람도 나 말곤 없어서 '역시 12시 반 미사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이 성당을 나가실 때 슬쩍 보니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계시길래 혹시 한국분인가 싶어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신부님의 반응이 자못 심상치 않았다.



 -한국어를 하시네요..?

 -....? 네. 한국인이니까요ㅎㅎ 근데 미사 시간 12시라고 들었었는데 아닌가 봐요?


 -누가 그래요? 12시라고?

 -저 마을 앞에 바에서 그러던데요...


 -미사는 12시 30분입니다. 오늘 어디에 가세요?

 -저 오늘 폰세바돈까지 가요. 미사 드리고 가려고요.


 -왜 거기에 가요?


  순례자한테 목적지엘 왜 가냐니, 이게 뭔 소리지 싶어 '예약해둔 곳이라 간다' 고 했더니 대뜸 이 마을에 묵으라고 하신다. 거기는 성당도 닫았고(알아요.. 그래서 여기서 미사 드리고 가려는 건데...?) 미사도 여기뿐이라고. 부드럽게 권하는 듯했지만 분명 강요하는 말투였고 나는 약간 황당한 마음으로 왜 여기에 묵어야 하냐고 물으니 좀 묘한 표정으로


 -.... 이따 오는 다른 한국 분들한테 물어보세요.


라고 하신다. 뭔가 질문만 던지고 답변은 하지 않는 독특한 화법이었다.


 

한국어로도 안내되어있는 미사 시간과 수도회 안내판.


  미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성당 앞에서 일기 쓰면서 발가락을 말렸고 미사 시간이 거의 되어 성당에 들어갔다. (아마도) 스페인 신부님과 아까 한국인 신부님이 스페인어로 집전하시는 미사였고 중간중간 영어도 있었다. 모든  전례가 그레고리안 성가로 진행되는 게 멋있고 독특했다. 중간에  딱 한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부분은 한국어로 해주셨다. 강론 때는 역시(?) 열심히 졸았지만 영성체 때 성혈에 성체를 살짝 찍어 분배하는 영혈성체를 분배하며 외국인 신부님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한국어로 말씀하셔서 살짝 놀랐다.




다시 또 등산



  미사가 끝난 후 1시 20분경, 서로 인사하는 마을 사람들과 이 마을에 묶어 가벼운 차림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다시 짐을 싸매고 마을을 출발했다. 목적지 폰세바돈까진 5.5-6km 정도 남아있었고 심지어 계속 오르막인 길이었지만 무사히 미사를 마친 뒤라 그런지 의지가 마구 솟아나는 듯했다. 콧김을 뿜고 팔을 부지런히 휘저어가며 마른 흙가루가 날리는 굉장한 경사의 산길을 부지런히 걸어 1시간 10분 만에 휘청하면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상태로 폰세바돈에 도착했다. 조용한 산골마을 같지만 마을 전체가 Bar 아니면 알베르게 둘 중 하나로 보일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산 꼭대기의 넓은 곳에 있는 마을 폰세바돈. 주변 지형이 다 낮아서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분다.
마을 입구의 철 십자가. 조금 더 가면 만나게 되는 이라체 고개의 '철십자가' 사본인 듯하다.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2층 침대를 배정받고서 침낭과 배낭을 벗어 햇볕에 좀 널고 샤워하려는데 샤워룸이 1개였다. 정말 작은 마을이긴 한가보다. 내 앞에 두 사람이 대기 중이길래 기다려서 샤워와 빨래까지 마치고 짐 정리하며 쉬었다. 일기 겸 가계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놀라서 빨래를 걷으러 가는데 지나가던 다른 순례자가(이건 순전히 느낌인데 왠지 이탈리아 사람 같아 보였다) ‘이거 그냥 지나가는 비다.  빨래를 걷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난 쿨하게 무시하고 빨래를 걷었다.  


  알베르게의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코스로 저녁을 먹는 내내 비가 요란하게 쏟아졌고, 마침 뒤늦게 젖은 빨래를 걷고서 동료들과 레스토랑에 들어오던 그 순례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냥 씩 웃어 보이고 말았다.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E9gu0refy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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